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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리키, 로저 르윈 [제6의 멸종]발췌(3)

나는 솔직히 생태주의자는 아니다. 어쩌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도시를 벗어나서 보이는 푸른 들, 바다 등을 인간문명과 구별되는 '자연'이라 보지 않는다... 오히려 맑스가 얘기했던 '인간화 된 자연'이라는 생각에 지금도 동조한다. 농촌은 자연적인가? 농업은 자연적인가? 나는 도시보다는 자연적(?) 일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바로 이 '인간화된 자연'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태어나든 아프리카 오지에 태어나든... 현재의 인류는 우리선조들이 영향을 미친 지구위에 살고 있고, 우리역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세기말부터의 '지속가능한?' 이라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해법에 대해 이제 좀 고민을 할때가 아닌가 한다...


그런면에서 이 책 [제6의 멸종]은 읽으면서 많이 웃었는데^^ 자연을 보는 관점이 생각보다 나와 많이 유사하다고 느꼈다. 생각보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참 어렵듯이,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우리 문명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 역시 참 어렵다... 우리 사회가 당위(當爲)보다는 반성(反省)이 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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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태학자들은 얼마나 많은 종이 멸종 위기에 있는지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추정되었을 뿐인 생물 다양성이 절박한 붕괴 상태에 놓여 있다고 경고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위해 폴 에를리히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이것은 최근 (사이언스)지에 보낸 편지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그것은 마치 전세계에서 유일한 유전자 도서관이 불타고 있는데도 그 속에 든 '책'의 권수가 한 자리수 이내로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절반 이상의 책이 화재로 20년 내에 타버릴 것인지 아니면 50년 내에 타버릴 것인지에 대해 화재 분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단언하건대, 몇몇 과학자들은 대화재가 발생해도 각 지점에서의 정확한 화염 온도를 알 수 없다면 결코 소방서에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금 다른 비유를 들까 한다. 거대한 소행성이 지구와의 충돌 경로 위로 떨어진다고 상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금세 걱정과 우려에 휩싸일 것이다.
왜냐하면 흔히 이러한 충격에 의해 과거에 대량 멸종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줄리언 사이먼과 그 동료들의 논리대로라면 소행성 충돌의 여파로 대량 멸종이 일어났다는 가설은 순전히 억측에다 어림짐작이기 때문에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나올 것이다. 실제로 어느 누구도 대멸종 사건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어쩌면 소행성은 지구 옆으로 빗나갈지도 모른다.
  만일 소행성을 살짝 비껴가게 하는 몇 가지 수단이 있다면 그것을 강구하지 않은 대가는 대파멸이 될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사이먼의 견해가 틀렸음이 밝혀질 것이다. 그렇다면 여섯 번째 멸종에 대한 그의 견해가 틀렸을 경우 우리에게 남겨질 대가는 무엇인가? 세계 생물 종의 절반이 21세기의 어느 순간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와 나머지 절반의 생물상에게는 도대체 어떤 문제가 생길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주어진 시간 기준이 어떠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긴 안목으로 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반 경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로 이 답을 제시하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반응이 생물 역사의 형태와 그 속에서의 우리 위치에 대한 철저한 '무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앞서 8장에서 생물 다양성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3가지 영역, 즉 경제성과 생태계 서비스, 그리고 심미적 기능에 대해 언급했다. 여기서 그 내용을 다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꼭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어느 영역에서 가치가 확인되든 다양성의 손실은 곧 그 가치의 손실을 의미하게 된다. 만일 동물과 식물이 새로운 물질과 식량, 약품의 잠재적인 출처라면 종의 손실은 그러한 면에 있어서의 가능성을 분명히 감소시킬 것이다. 만일 식물과 동물의 상호 작용망이 대기와 토양의 화학적 성질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면 종의 손실은 이러한 서비스의 효능을 감소시킬 것이다. 그리고 만일 풍부한 종 다양성이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종의 손실은 딱히 표현하기 힘들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를 약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이 3가지 영역에 맞는 합리적인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자. 경제적 가치, 생태계 서비스, 심미적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해 현존하는 모든 종이 꼭 필요한가? 아니면 이 3가지는 손상시키지 않은 채 일부 종만 잃을 수는 없을까? 줄리언 사이먼은 이에 대해 명백히 답변하고 있다. 그는 정착민들이 미국의 중서부를 개척했을 때 발생한 종의 대량 손실을 예로 든다. 노먼 마이어와의 논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때 사라진 종들이 지금 존속한다고 해서 우리의 현재 상태가 엄청나게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실은 어디에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종의 경제적인 가치를 의문스럽게 만든다."
  사이먼에게 있어서 중요한 가치 측정 기준은 경제적이고도 직접적인 실용성이다.
이것은 그가 논쟁을 벌일 때 계속 언급한 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최근의 과학 기술 진보(특히 종자 은행과 유전 공학)는 자연 서식처에서 종을 유지시키려는 노력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감소시켰다." 레스 카우프만은 이와는 아주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책 '최후의 멸종'에서 자연 서식처에 사는 종의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미국의 정신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나그네비둘기, 평원의 물소, 아메리카밤나무의 절멸과 더불어 죽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인공적인 도시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 자연 경제의 투입과 산출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투입과 산출은 식물의 잔뿌리를 부양하는 균사로부터 물과 산소, 이산화탄소 등 지구의 물질 순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크기의 생물 종과 종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이다. 투입과 산출은 앞서 언급한 생태계 서비스이기도 하다. 지구 전체의 생물상은 복잡한 역학에 의해 작용한다. 투입과 산출은 이 생물상으로부터 나오는 안정성과 건강성의 실체적인 요소이다. 그러면 이러한 건강성과 안정성은 정확히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알지 못한다.
  모든 생태적 영역에서 종의 비율을 감소시킴으로써 개체군의 크기가 줄어들었는데도 여전히 생태계가 효율적일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도 역시 알지 못한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가? 이에 대해서는 단지 불완전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비롯한 모든 생물을 지탱하는 '계'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고 어떤 종이나 종의 무리만 제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불완전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자연계에 대해 우리는 이토록 무지스럽다. 실로 실망스러울 정도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8장에서 다룬 것처럼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것만은 똑똑히 알고 있다. 다른 모든 생물의 삶을 지배하는 법칙으로부터 호모 사피엔스 역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건강한 지구 생물상을 유지하기 위해 현존하는 생물 다양성의 얼마만큼이 필요한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과연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1) 생물 다양성 전체를 필요로 하는지 어떤지 잘 모르기 때문에 아예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2) 우리가 사는 계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생물 다양성 전체를 필요로 한다고 가정한다.
  이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더 책임있는 태도인가? 그 답은 너무나 명백하다.
왜냐하면 첫 번째 가정이 틀렸을 경우 우리가 치러내야 할 대가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불완전하긴 하지만 생태계 서비스의 구조와 역학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많은 생태학자들이 유추하건대, 현재 우리가 가진 생물 다양성 전부 아니면 적어도 대부분을 필요로 한다고 믿어진다. 경제 성장에 따른 생물 다양성의 계속적인 파괴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자연계가 스스로를,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지탱할 수 없는 지경까지도 몰아갈 수 있다.

  계속적인 파괴를 멈추지 않는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여섯 번째 멸종의 원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그 희생자의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를 살아간다. 우리 주위의 세계를 바라보노라면 장구한 시간에 걸친 변화를 인식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이 몰아가고 있는 생물학적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리고 한 종으로서의 우리의 미래가 어디에 놓일 것인지 제대로 알려면 '시간'에 대한 조망이 가장 중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생물의 화석 기록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에게 현재의 경험과 상상을 넘어 저 만 시간대에 존재했던 생물계의 역학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의 역사 기록이 주는 가장 즉각적이 메시지는 중대한 생물 다양성의 붕괴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생물 흐름상의 위기는 대단히 빠르고 거꾸로 역행할 수 없으며 자칫 예측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자연계(우리 역시 그 일부로 존재하는)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통찰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종과 종 집단은 외부의 손상에 무한정 탄력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공격받기 쉽고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우리는 대량 멸종이 지구와 외계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 그리고 갖가지 지구의 변화에 의해 촉진될 수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그러한 생물학적 위기의 잠재적인 동인으로 보지는 않는다.
매일같이 베어져나가는 열대림과 야생 서식처의 잠식은 소행성의 충돌보다 극적인 감은 덜하지만 어쨌든 생태계에 충격을 주는 요인이 된다. 그리고 결국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알게 모르게 대량 멸종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마치 자연계가 우리의 공격을 끄떡없이 견뎌낼 수 있을 것처럼 그것을 마구 다루고 있다. 그러나 벌목과 서식처 파괴 등 자연에 해를 입히는 모든 일을 할 때 우리는 그 순간 우리 자신의 위험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화석 기록은 지구의 전역사를 통해 생물의 흐름이 결코 정적인 현상이 아닌, 오히려 동적인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코 안정된 진보를 거듭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량 도살에 의해 중단되었고 그 희생자들(개개의 조이나 종 집단, 또는 생태계 그 어느 쪽이든)은 영원히 사라졌다. 한 종의 죽음은 수백만 년 동안 이어진 유전자 고리의 사슬을 끊어놓는다. 유일무이한 유전자 더미가 지구의 다양성으로부터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이 종의 절멸을 가져올 때마다 우리들 개개인은 유일한 생물의 일부를 영원히 소멸시킨 책임을 조금씩 나눠갖게 된다.
  나는 이러한 책임을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반 경고주의자들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다시 화석 기록을 살펴보자. 그러면 생물 종의 삶이 어쨌거나 평균 1백만 년에서 1천만 년 사이로 한정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비교적 오래 산 종은 자연계에서 수명이 다소 짧다). 어떤 종은 꾸준히 되풀이되는 배경 멸종 과정에서 자신의 임기를 마쳤고, 또 다른 종들은 대량 죽음이라는 격변에 의해 종의 일생을 마감했다.
  반 경고주의자들은 종을 구하려는 시도에 대해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 낭비'라고 말한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시간이 흐르면 종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스티븐 제이 굴드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응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모든 인간이 결국은 죽게 되어 있으므로 쉽게 고칠 수 있는 어린 아이의 병을 치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할 작정이다. 왜냐하면 이 쟁점 안에는 지질학상의 시간과 그 속에서의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지위를 둘러싼 윤리적인 논쟁의 중요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석 기록의 두 번째 메시지. 진화는 불가사의하고도 강력한 창조 과정이며 각각의 대량 멸종 후에 남겨진 빈 자리를 채운다. 현세의 생물 다양성은 5번의 주요한 생물 위기와 12번이 넘는 작은 생물 위기를 거쳤다. 그후 거듭해서 되풀이된 재회복의 결과, 다양성의 정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높은 상태이다. 가끔씩 멸종 사건 이후 새로운 종이 갑작스레 출현함으로써 우세한 생물 형태가 변형되기도 한다.
  우리는 현재 포유류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는 6천5백만 년 전 공룡의 멸망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대에 가장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종은 영장류이며 그 무리의 최정상에 바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서있다. 여섯 번째 멸종이 끝나고 난 뒤에도 다양성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금씩 회복될 것이다.
그러면 파괴의 원인(오늘날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 역시 당연히 과거의 일로 지나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과거에 비추어 미래를 평가할 수 있다면 생물의 다양성은 지금보다 훨씬 확장될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더욱 새로운 진화의 '신고안품'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만일 자연이 대량 멸종에 뒤이어 그처럼 떠들썩하게 회복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대량 멸종을 이끄는 데 굳이 개의치 않아도 좋을 것이다. 자, 이 모두에 대한 답은 우리가 돌이켜보고 있는 '시간대'에 달려 있다. 대량 멸종은 사실상 그후의 회복 기간에 비하면 순식간이나 마찬가지다. 소행성 충돌에 의한 멸종은 대략 몇 년 혹은 몇 세기에 걸쳐 일어나며, 지구상에 있는 무언가가 원인이 된 경우 수천 년 또는 수백만 년에 걸쳐 일어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해 우리의 보금자리를 더럽히지 않고 우리의 생존과 정신을 의존하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시키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구상에서 하나뿐인 지각있는 생물로서 전세계 무든 종의 삶을 보호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세계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종들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보호를 받을 절대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간곡한 권고이며 호소이다.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로서나 전체적인 종으로서나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우리의 행동을 재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곧 매일 1백 종을, 1시간당 4종씩을 진화의 망각 속으로 몰아넣는 교묘한 대량 파괴를 멈추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처럼 인간 중심의 관점이 아니라 나머지 자연 종의 관점에서 하나의 명령을 더 덧붙이고 싶다. 이것은 지구 역사를 조망한 결과 자연스럽게 비롯된 관점이다.
  여섯 번째 멸종은 이전의 생물 격변과 여러 측면에서 비슷하다. 이를테면 가장 공격받기 쉬운 종은 지리적 분포가 한정된 종, 즉 열대 지방과 그 부근 지역의 종이다. 특히 몸집이 큰 종이 쉽게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여섯 번째 멸종은 이전의 경우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특히 수많은 식물 종이 사라져가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위기와 비교해 볼 때 전례없는 특이한 현상이다. 그러나 결국 5백만 년이나 1천만 년 혹은 2천만 년이 지나면 이러한 식물 종의 소멸과 또 다른 생물상의 뒤틀림에도 불구하고 크나큰 반동이 일어날 것이다.
  굴드가 말한 바 그대로다. 그는 "지질학적 잣대로 보아 우리의 지구는 스스로를 돌볼 것이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인간의 불법 행위가 야기한 어떤 영향이든 깨끗이 처리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면 긴 안목으로 볼 때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무엇을 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왜 우리처럼 언젠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종의 생존에 우리가 이토록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 그것은 비록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고 해도 우리 또한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우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에게, 결론적으로 이들의 생존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지구의 생물을 다룰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채 외계로부터 어느날 갑자기 엄청난 생물 다양성의 한복판에 착륙하듯 지구에 오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종들과 마찬가지로 5억 년 전 생물 형태의 급격한 번성과 그 이전의 생명 자체의 기원으로까지 이어지는 많은 '우연한 사건'들의 산물이다. '생명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와 나머지 자연 세계와의 깊은 관계를 이해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윤리적인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우리의 의무는 그들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현재 지구상에 있는 다른 모든 종과 똑같은 발판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결코 지구상에서 하나뿐인 우월한 지적 생물로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차원이 아닌 것이다. 전체론적인 의미로 지구의 생물상을 이해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그 전체 생물상의 일부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생물상을 개척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종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생물 자체와 그들의 안녕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며 윤리적인 원칙이다. 결코 맹목적인 목적 수행을 위해 다른 종들을 짓밟아서는 안된다.

  호모 사피엔스는 언젠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무엇을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생물들을 마구 파괴해도 좋다고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너무 '이상적'인 말만 한다고 이의를 단다면 기꺼이 인정할 용의가 있다. 나는 고생물학자이며 보호주이자이다. 이런 이중적인 경력이 나에게 '생물 다양성의 가치'와 '시간의 흐름에 의한 변화'에 대해 독특한 관점을 갖도록 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실질적인 관점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 다시 말해 주위의 자연 세계을 개발함으로써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지켜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 파괴를 막는 한편, 생존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제대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은 21세기에 인류가 감수해야 할 최대의 도전이다. 이것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각기 서로 다른 요구가 합의점을 찾아야만 해결될 수 있다. 만일 부유한 국가가 개발 도상국의 국민들을 영구적인 가난 속에 묶어두는 방법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대량 멸종은 오랫동안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가사의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대부분 생물 흐름의 단순한 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쉽게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대량 멸종은 생물 흐름을 구체화하는 주요한 창조력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작용은 앞으로 수십억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호모 사피엔스와 그 후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까마득한 미래까지도 틀림없이 지금처럼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대량 멸종의 수수께끼는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그것을 이끄는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풀 길이 없다.
  데이비드 라우프는 그의 책 '멸종, 나쁜 유전자 때문인가 나쁜 운 때문인가'에서 이렇게 썼다. "곤혹스러운 사실은 과거 지질 역사에서 뚜렷이 기록된 수천 가지의 멸종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그 멸종이 왜 일어났는지 확실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5 대 멸종 각각에 대해 무엇이 그들을 이끌었는지에 관한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 또한 그들 중 일부는 주목을 끌 만하다. 하지만 사실상 모두 이론일 뿐, 그 어느 것도 증명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섯 번째 멸종의 범인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