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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님의 시 몇가지

서른의 나이로 하늘로 가버린 시인 기형도.
시인의 시가 유명해졌을때, 서점에서 몇개를 읽고는 닫아버렸다...
너무 어둡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35살이 꺾이고... 다시 시도해 본  기형도...
알게 모르게 두눈에 무언가 흐름을 느끼게 되었다.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은 많고도 많다.
많고도 많거니와... 위선이 아닐까는 의심까지 가지게 한다...
그러나 절망과 어두움을 그 바닥까지 내려가 보려는 시인은 드물다...
기형도시인의 암울함은 바로 솔직함...
그 솔직함에 달랑 시집 한권으로 아직도 좋은시인의 반열에 오르는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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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의 희망

   
     김(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간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 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 번 꽃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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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끔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 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 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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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2        -- 붉은 달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 세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있을 그대.
     잘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이 적시던 헝겊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
     턱턱, 짧은 숨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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