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솔직히 생태주의자는 아니다. 어쩌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도시를 벗어나서 보이는 푸른 들, 바다 등을 인간문명과 구별되는 '자연'이라 보지 않는다... 오히려 맑스가 얘기했던 '인간화 된 자연'이라는 생각에 지금도 동조한다. 농촌은 자연적인가? 농업은 자연적인가? 나는 도시보다는 자연적(?) 일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바로 이 '인간화된 자연'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태어나든 아프리카 오지에 태어나든... 현재의 인류는 우리선조들이 영향을 미친 지구위에 살고 있고, 우리역시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세기말부터의 '지속가능한?' 이라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해법에 대해 이제 좀 고민을 할때가 아닌가 한다...
그런면에서 이 책 [제6의 멸종]은 읽으면서 많이 웃었는데^^ 자연을 보는 관점이 생각보다 나와 많이 유사하다고 느꼈다. 생각보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가 참 어렵듯이,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우리 문명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 역시 참 어렵다... 우리 사회가 당위(當爲)보다는 반성(反省)이 좀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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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태학자들은 얼마나 많은 종이 멸종 위기에 있는지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추정되었을 뿐인 생물 다양성이 절박한 붕괴 상태에 놓여 있다고 경고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위해 폴 에를리히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이것은 최근 (사이언스)지에 보낸 편지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그것은 마치 전세계에서 유일한 유전자 도서관이 불타고 있는데도 그 속에 든 '책'의 권수가 한 자리수 이내로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절반 이상의 책이 화재로 20년 내에 타버릴 것인지 아니면 50년 내에 타버릴 것인지에 대해 화재 분석가들의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단언하건대, 몇몇 과학자들은 대화재가 발생해도 각 지점에서의 정확한 화염 온도를 알 수 없다면 결코 소방서에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금 다른 비유를 들까 한다. 거대한 소행성이 지구와의 충돌 경로 위로 떨어진다고 상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금세 걱정과 우려에 휩싸일 것이다.
왜냐하면 흔히 이러한 충격에 의해 과거에 대량 멸종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줄리언 사이먼과 그 동료들의 논리대로라면 소행성 충돌의 여파로 대량 멸종이 일어났다는 가설은 순전히 억측에다 어림짐작이기 때문에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나올 것이다. 실제로 어느 누구도 대멸종 사건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어쩌면 소행성은 지구 옆으로 빗나갈지도 모른다.
만일 소행성을 살짝 비껴가게 하는 몇 가지 수단이 있다면 그것을 강구하지 않은 대가는 대파멸이 될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사이먼의 견해가 틀렸음이 밝혀질 것이다. 그렇다면 여섯 번째 멸종에 대한 그의 견해가 틀렸을 경우 우리에게 남겨질 대가는 무엇인가? 세계 생물 종의 절반이 21세기의 어느 순간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와 나머지 절반의 생물상에게는 도대체 어떤 문제가 생길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주어진 시간 기준이 어떠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질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긴 안목으로 보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반 경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로 이 답을 제시하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반응이 생물 역사의 형태와 그 속에서의 우리 위치에 대한 철저한 '무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앞서 8장에서 생물 다양성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3가지 영역, 즉 경제성과 생태계 서비스, 그리고 심미적 기능에 대해 언급했다. 여기서 그 내용을 다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꼭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어느 영역에서 가치가 확인되든 다양성의 손실은 곧 그 가치의 손실을 의미하게 된다. 만일 동물과 식물이 새로운 물질과 식량, 약품의 잠재적인 출처라면 종의 손실은 그러한 면에 있어서의 가능성을 분명히 감소시킬 것이다. 만일 식물과 동물의 상호 작용망이 대기와 토양의 화학적 성질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면 종의 손실은 이러한 서비스의 효능을 감소시킬 것이다. 그리고 만일 풍부한 종 다양성이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종의 손실은 딱히 표현하기 힘들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를 약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이 3가지 영역에 맞는 합리적인 질문을 던져보도록 하자. 경제적 가치, 생태계 서비스, 심미적 즐거움을 만족시키기 위해 현존하는 모든 종이 꼭 필요한가? 아니면 이 3가지는 손상시키지 않은 채 일부 종만 잃을 수는 없을까? 줄리언 사이먼은 이에 대해 명백히 답변하고 있다. 그는 정착민들이 미국의 중서부를 개척했을 때 발생한 종의 대량 손실을 예로 든다. 노먼 마이어와의 논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때 사라진 종들이 지금 존속한다고 해서 우리의 현재 상태가 엄청나게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실은 어디에선가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종의 경제적인 가치를 의문스럽게 만든다."
사이먼에게 있어서 중요한 가치 측정 기준은 경제적이고도 직접적인 실용성이다.
이것은 그가 논쟁을 벌일 때 계속 언급한 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최근의 과학 기술 진보(특히 종자 은행과 유전 공학)는 자연 서식처에서 종을 유지시키려는 노력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감소시켰다." 레스 카우프만은 이와는 아주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책 '최후의 멸종'에서 자연 서식처에 사는 종의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미국의 정신 가운데 적어도 일부는 나그네비둘기, 평원의 물소, 아메리카밤나무의 절멸과 더불어 죽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인공적인 도시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 자연 경제의 투입과 산출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투입과 산출은 식물의 잔뿌리를 부양하는 균사로부터 물과 산소, 이산화탄소 등 지구의 물질 순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크기의 생물 종과 종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 작용이다. 투입과 산출은 앞서 언급한 생태계 서비스이기도 하다. 지구 전체의 생물상은 복잡한 역학에 의해 작용한다. 투입과 산출은 이 생물상으로부터 나오는 안정성과 건강성의 실체적인 요소이다. 그러면 이러한 건강성과 안정성은 정확히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우리는 여기에 대해 알지 못한다.
모든 생태적 영역에서 종의 비율을 감소시킴으로써 개체군의 크기가 줄어들었는데도 여전히 생태계가 효율적일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도 역시 알지 못한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가? 이에 대해서는 단지 불완전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비롯한 모든 생물을 지탱하는 '계'에 아무런 해를 주지 않고 어떤 종이나 종의 무리만 제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불완전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자연계에 대해 우리는 이토록 무지스럽다. 실로 실망스러울 정도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8장에서 다룬 것처럼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이것만은 똑똑히 알고 있다. 다른 모든 생물의 삶을 지배하는 법칙으로부터 호모 사피엔스 역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건강한 지구 생물상을 유지하기 위해 현존하는 생물 다양성의 얼마만큼이 필요한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앞에 두고 과연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1) 생물 다양성 전체를 필요로 하는지 어떤지 잘 모르기 때문에 아예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2) 우리가 사는 계의 복잡성을 인정하고 생물 다양성 전체를 필요로 한다고 가정한다.
이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더 책임있는 태도인가? 그 답은 너무나 명백하다.
왜냐하면 첫 번째 가정이 틀렸을 경우 우리가 치러내야 할 대가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불완전하긴 하지만 생태계 서비스의 구조와 역학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많은 생태학자들이 유추하건대, 현재 우리가 가진 생물 다양성 전부 아니면 적어도 대부분을 필요로 한다고 믿어진다. 경제 성장에 따른 생물 다양성의 계속적인 파괴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자연계가 스스로를,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지탱할 수 없는 지경까지도 몰아갈 수 있다.
계속적인 파괴를 멈추지 않는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여섯 번째 멸종의 원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그 희생자의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를 살아간다. 우리 주위의 세계를 바라보노라면 장구한 시간에 걸친 변화를 인식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이 몰아가고 있는 생물학적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리고 한 종으로서의 우리의 미래가 어디에 놓일 것인지 제대로 알려면 '시간'에 대한 조망이 가장 중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생물의 화석 기록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에게 현재의 경험과 상상을 넘어 저 만 시간대에 존재했던 생물계의 역학을 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의 역사 기록이 주는 가장 즉각적이 메시지는 중대한 생물 다양성의 붕괴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생물 흐름상의 위기는 대단히 빠르고 거꾸로 역행할 수 없으며 자칫 예측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자연계(우리 역시 그 일부로 존재하는)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통찰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종과 종 집단은 외부의 손상에 무한정 탄력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공격받기 쉽고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다. 우리는 대량 멸종이 지구와 외계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 그리고 갖가지 지구의 변화에 의해 촉진될 수 있다고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그러한 생물학적 위기의 잠재적인 동인으로 보지는 않는다.
매일같이 베어져나가는 열대림과 야생 서식처의 잠식은 소행성의 충돌보다 극적인 감은 덜하지만 어쨌든 생태계에 충격을 주는 요인이 된다. 그리고 결국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알게 모르게 대량 멸종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마치 자연계가 우리의 공격을 끄떡없이 견뎌낼 수 있을 것처럼 그것을 마구 다루고 있다. 그러나 벌목과 서식처 파괴 등 자연에 해를 입히는 모든 일을 할 때 우리는 그 순간 우리 자신의 위험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화석 기록은 지구의 전역사를 통해 생물의 흐름이 결코 정적인 현상이 아닌, 오히려 동적인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코 안정된 진보를 거듭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량 도살에 의해 중단되었고 그 희생자들(개개의 조이나 종 집단, 또는 생태계 그 어느 쪽이든)은 영원히 사라졌다. 한 종의 죽음은 수백만 년 동안 이어진 유전자 고리의 사슬을 끊어놓는다. 유일무이한 유전자 더미가 지구의 다양성으로부터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이 종의 절멸을 가져올 때마다 우리들 개개인은 유일한 생물의 일부를 영원히 소멸시킨 책임을 조금씩 나눠갖게 된다.
나는 이러한 책임을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반 경고주의자들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다시 화석 기록을 살펴보자. 그러면 생물 종의 삶이 어쨌거나 평균 1백만 년에서 1천만 년 사이로 한정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비교적 오래 산 종은 자연계에서 수명이 다소 짧다). 어떤 종은 꾸준히 되풀이되는 배경 멸종 과정에서 자신의 임기를 마쳤고, 또 다른 종들은 대량 죽음이라는 격변에 의해 종의 일생을 마감했다.
반 경고주의자들은 종을 구하려는 시도에 대해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 낭비'라고 말한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상관없이 시간이 흐르면 종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스티븐 제이 굴드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응수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모든 인간이 결국은 죽게 되어 있으므로 쉽게 고칠 수 있는 어린 아이의 병을 치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할 작정이다. 왜냐하면 이 쟁점 안에는 지질학상의 시간과 그 속에서의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지위를 둘러싼 윤리적인 논쟁의 중요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석 기록의 두 번째 메시지. 진화는 불가사의하고도 강력한 창조 과정이며 각각의 대량 멸종 후에 남겨진 빈 자리를 채운다. 현세의 생물 다양성은 5번의 주요한 생물 위기와 12번이 넘는 작은 생물 위기를 거쳤다. 그후 거듭해서 되풀이된 재회복의 결과, 다양성의 정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높은 상태이다. 가끔씩 멸종 사건 이후 새로운 종이 갑작스레 출현함으로써 우세한 생물 형태가 변형되기도 한다.
우리는 현재 포유류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는 6천5백만 년 전 공룡의 멸망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대에 가장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종은 영장류이며 그 무리의 최정상에 바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서있다. 여섯 번째 멸종이 끝나고 난 뒤에도 다양성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금씩 회복될 것이다.
그러면 파괴의 원인(오늘날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 역시 당연히 과거의 일로 지나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만일 과거에 비추어 미래를 평가할 수 있다면 생물의 다양성은 지금보다 훨씬 확장될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더욱 새로운 진화의 '신고안품'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만일 자연이 대량 멸종에 뒤이어 그처럼 떠들썩하게 회복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대량 멸종을 이끄는 데 굳이 개의치 않아도 좋을 것이다. 자, 이 모두에 대한 답은 우리가 돌이켜보고 있는 '시간대'에 달려 있다. 대량 멸종은 사실상 그후의 회복 기간에 비하면 순식간이나 마찬가지다. 소행성 충돌에 의한 멸종은 대략 몇 년 혹은 몇 세기에 걸쳐 일어나며, 지구상에 있는 무언가가 원인이 된 경우 수천 년 또는 수백만 년에 걸쳐 일어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해 우리의 보금자리를 더럽히지 않고 우리의 생존과 정신을 의존하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시키지 않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구상에서 하나뿐인 지각있는 생물로서 전세계 무든 종의 삶을 보호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세계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종들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보호를 받을 절대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간곡한 권고이며 호소이다.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로서나 전체적인 종으로서나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우리의 행동을 재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곧 매일 1백 종을, 1시간당 4종씩을 진화의 망각 속으로 몰아넣는 교묘한 대량 파괴를 멈추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처럼 인간 중심의 관점이 아니라 나머지 자연 종의 관점에서 하나의 명령을 더 덧붙이고 싶다. 이것은 지구 역사를 조망한 결과 자연스럽게 비롯된 관점이다.
여섯 번째 멸종은 이전의 생물 격변과 여러 측면에서 비슷하다. 이를테면 가장 공격받기 쉬운 종은 지리적 분포가 한정된 종, 즉 열대 지방과 그 부근 지역의 종이다. 특히 몸집이 큰 종이 쉽게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여섯 번째 멸종은 이전의 경우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특히 수많은 식물 종이 사라져가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위기와 비교해 볼 때 전례없는 특이한 현상이다. 그러나 결국 5백만 년이나 1천만 년 혹은 2천만 년이 지나면 이러한 식물 종의 소멸과 또 다른 생물상의 뒤틀림에도 불구하고 크나큰 반동이 일어날 것이다.
굴드가 말한 바 그대로다. 그는 "지질학적 잣대로 보아 우리의 지구는 스스로를 돌볼 것이며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인간의 불법 행위가 야기한 어떤 영향이든 깨끗이 처리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면 긴 안목으로 볼 때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무엇을 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왜 우리처럼 언젠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종의 생존에 우리가 이토록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 그것은 비록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고 해도 우리 또한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우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에게, 결론적으로 이들의 생존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지구의 생물을 다룰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채 외계로부터 어느날 갑자기 엄청난 생물 다양성의 한복판에 착륙하듯 지구에 오지 않았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종들과 마찬가지로 5억 년 전 생물 형태의 급격한 번성과 그 이전의 생명 자체의 기원으로까지 이어지는 많은 '우연한 사건'들의 산물이다. '생명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와 나머지 자연 세계와의 깊은 관계를 이해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윤리적인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우리의 의무는 그들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현재 지구상에 있는 다른 모든 종과 똑같은 발판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결코 지구상에서 하나뿐인 우월한 지적 생물로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차원이 아닌 것이다. 전체론적인 의미로 지구의 생물상을 이해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그 전체 생물상의 일부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생물상을 개척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종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생물 자체와 그들의 안녕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며 윤리적인 원칙이다. 결코 맹목적인 목적 수행을 위해 다른 종들을 짓밟아서는 안된다.
호모 사피엔스는 언젠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무엇을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생물들을 마구 파괴해도 좋다고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너무 '이상적'인 말만 한다고 이의를 단다면 기꺼이 인정할 용의가 있다. 나는 고생물학자이며 보호주이자이다. 이런 이중적인 경력이 나에게 '생물 다양성의 가치'와 '시간의 흐름에 의한 변화'에 대해 독특한 관점을 갖도록 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 실질적인 관점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 다시 말해 주위의 자연 세계을 개발함으로써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지켜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 파괴를 막는 한편, 생존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제대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은 21세기에 인류가 감수해야 할 최대의 도전이다. 이것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각기 서로 다른 요구가 합의점을 찾아야만 해결될 수 있다. 만일 부유한 국가가 개발 도상국의 국민들을 영구적인 가난 속에 묶어두는 방법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이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대량 멸종은 오랫동안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가사의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대부분 생물 흐름의 단순한 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쉽게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대량 멸종은 생물 흐름을 구체화하는 주요한 창조력으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작용은 앞으로 수십억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호모 사피엔스와 그 후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까마득한 미래까지도 틀림없이 지금처럼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대량 멸종의 수수께끼는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그것을 이끄는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가 라는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풀 길이 없다.
데이비드 라우프는 그의 책 '멸종, 나쁜 유전자 때문인가 나쁜 운 때문인가'에서 이렇게 썼다. "곤혹스러운 사실은 과거 지질 역사에서 뚜렷이 기록된 수천 가지의 멸종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그 멸종이 왜 일어났는지 확실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5 대 멸종 각각에 대해 무엇이 그들을 이끌었는지에 관한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 또한 그들 중 일부는 주목을 끌 만하다. 하지만 사실상 모두 이론일 뿐, 그 어느 것도 증명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섯 번째 멸종의 범인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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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리키, 로저 르윈 [제6의 멸종]발췌(2)
"눈에 보이는 자연만이 전부는 아니다. 생태 군집 내에는 반직관적인, 따라서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동력이 작용하고 있다. 군집은 항상 변화하고 있으며 얼핏 목적을 갖고 스스로 진보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연'과 '역사'가 진화에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이러한 역학을 드러내고 시간의 흐름을 통한 변화의 중요성을 보여주며, 장차 보호주의자들에게 유익함이 될 실제 생태계의 이야기로 이 장을 맺으려 한다. 보츠와나 북부의 초베 국립공원은 아프리카 남부와 동부에 있는 여러 생태계의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그곳에는 많은 대형 초식 동물들 기린, 물소, 코끼리, 얼룩말, 누, 임팔라 등이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이주하며 살아간다. 사자, 하이에나, 야생개, 자칼은 풍부한 육식 동물군을 이룬다. 초원에 아카시아 숲이 듬성듬성 자리잡은 모자이크 서식처는 다양한 새와 곤충 종을 숨겨준다. 요컨대 초베 공원은 사람들이 '야생 동물'이란 단어를 들을 때 떠올리는 바로 그런 종류의 풍부한 종 다양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공원 관리자들은 이 다양성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도 해야 하지만 원래대로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는 인식을 더 강하게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아카시아 숲이 코끼리들에 의해 마구 파괴되어 가는데도 새로운 나무는 전혀 자라지 않고 있다.
숲이 줄어들어 단지 옛 자취로 남게 되면 관리자들은 자신이 다양성의 보존에 실패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들은 모든 것이 지금처럼 유지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렇게 유지하는 것은 생태학적으로 잘못이다. 뿐만 아니라 유지 자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 공원의 생태 역사를 들여다보면 왜 그런지를 알 수 있다.
사부티 수로는 주변 지역의 표면수 공급원으로 매우 중요하다. 물이 가득 찰 경우, 이 수로는 앙골라에서부터 린얀티 늪지를 경유하여 사부티 소택지 지금은 초원으로 변했다로 흘러들어간다. 1800 년대 말에 가득 찼던 이 수로는 1900 년대로 접어들면서 마르기 시작했다. 그러기 1950 년대 중반까지 계속 말라있는 상태였다. 그후 물이 좀 차는가 싶더니 1982 년에 다시 말라 지금까지 계속 그 상태로 남아 있다. 20세기 초 사부티 수로가 마르고 난 직후, 그곳에서 우역(역주: 소 전염병. 반추동물의 급성 바이러스 병)이 창궐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오늘날 아카시아 숲이 탄생하는 데 산파 역할을 해냈다.
물의 부족은 코끼리가 물을 찾아 사방을 헤매도록 했으며(사냥도 코끼리의 숫자를 줄이는 데 한몫했다) 우역이라는 풍토병은 유제류 개체군에 치명타를 가했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의 방목 압력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아카시아 묘목 (많은 동물들이 좋아하는 먹이이다)은 나무로 완전히 자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즈음 코끼리의 유제류가 다시 회복되었고 광대한 아카시아 숲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이 지역에서 상세한 연구를 수행했던 브라이언 월커Walker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우리가 보는 수많은 코끼리와 광대한 아카시아 숲의 공존은 시간상 매우 한정된 장면을 나타낸다. 이 공존은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유는 아주 분명하다. 이 지역에서 코끼리와 유제류 무리가 번성하는 한 아카시아 묘목은 다 자랄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숲이 다시 무성해지려면 동물들이 제거되어야만 할 것이다. 월커는 "문제는 관리자들과 관광객들이 사실상 동물을 볼 수 없게 되는 10 년에서 15 년 동안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초베 공원의 종 다양성은 자연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나는 실질적인 환경 변화에 의해 생겨난 결과이다.
공원 관리자들은 흔히 그러한 변화를 거스른다. 적어도 가치있는 무언가가 뚜렷이 사라지는 것을 볼 때 그들은 그렇게 한다. 생태계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모두 일정한 혼란 상태에 있으며, 어느 시점에서 일부 개체군이 감소하는 반면 또 다른 개체군은 번성할 수도 있다. 일정한 변화는 종 다양성의 원동력이 되므로 변화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월커는 "보호주의자들은 특정한 식물이나 동물 종의 존속을 걱정하는 데 쏟는 시간을 좀 줄일 필요가 있다. 대신 이제는 생태계 과정의 본질과 다양성을 유지하는 쪽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군집 조립의 카오스적인 측면이나 역학을 이해함으로써 생태계의 본질에 대한 안목을 갖춘다면 월커가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 내용이 옳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무릇 인간만사가 다 그러하듯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을 관리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리고 줄어드는 숲,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가는 동물들을 수수방관하며 지켜보기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그렇게 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
"틸만과 그의 동료들은 "멸종은 서식처가 동강난 뒤 그 이후 세대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멸종은 미래에 우리가 치러야 할 빚이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는 5백 년도 훨씬 넘은 그 옛날, 오래 전에 있었던 서식처 파괴의 영향이 지금까지도 세계 도처에서 파문을 일으킬 수 있음을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저지르는 환경 파괴의 악영향은 이후 5백년이나 우리 자손의 자손에게 찾아갈 것이다. 결국 우리는 멸종의 빚을 쌓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서식처의 파괴와 단편화가 하와이 제도가 겪었던 멸종 파동에 상당한 책임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정착지를 찾아 단독으로 이동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고양이, 개, 돼지, 염소와 같은 동물은 일부러 데려가며 쥐처럼 무임승차한 동물을 무심결에 동반하는 경우도 있다. 이전까지 포유류가 없었던 섬 생태계에 이 생물들이 들어오면서 경쟁이나 약탈 등 일대 혼란이 벌어진다. 연한 잎을 뜯어먹는 데 명수인 염소는 고유종을 과다하게 먹어치워 점차 자연 경관을 헐벗게 만든다.
2백 년 전 갈라파고스 군도의 여러 섬에 도입된 염소는 일부 섬을 사실상 벌거벗은 바위로 만들어버렸다. 포식자는 한 군집의 생물들이 위험을 느낄 정도로 크거나 공격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들은 훨씬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람과 동반한 포식자 무리 가운데 쥐가 멸종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크게 놀랄지도 모른다. 잡식성인 쥐는 조류와 파충류의 알과 어린 새끼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생물 순환의 파괴를 불러일으킨다.
알다시피 생태 군집은 그저 같은 지역에 우연히 함께 살게 된 종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들은 복잡한 먹이 연쇄를 통해 약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상호 작용을 한다. 그 결과 한 종의 멸종은 군집 전체에 파장을 미쳐 더 많은 멸종을 야기시킨다. 일례로, 하와이 제도의 많은 식물 종들은 구부러진 길다란 부리에 꽃의 수분을 의존하던 꿀새가 사라짐으로써 그만 멸종 직전에 놓여 있다. 이것은 직접적인 의존의 한 보기이나 의존의 사슬이 다소 간접적일 수도 있다. 대형 초식 동물들은 종종 그보다 작은 초식 동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큰 종의 활동 결과로 서식처가 트이기 때문이다.
이들 대형 초식 동물에 의한 파괴의 영향으로 그 서식처 식물 사이에 다양성과 생산성이 촉진된다. 이러한 '쐐기돌 초식 동물'이 제거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나탈의 훌루훌루웨 야생동물보호구에서 코끼리가 사라졌을 때를 상기해 보면 된다. 1세기도 지나지 않아 3종의 영양이 국부적으로 멸종했고 누와 워터벅 개체군까지 감소했다. 코끼리가 사라졌을 때 그보다 작은 초식 동물이 살아가면서 서식처를 만들던 그들의 습성 또한 사라진 것이다.
생태 군집은 복잡한 '계'이다. 복잡성이 실질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군집의 파괴가 자연계에 미치는 영향에서 보다 뚜렷이 나타난다. 이제는 멀지 않은 과거에 이러한 파괴의 주요 원인이 인간의 존재에 의해 구체화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생태 파괴의 정도, 특히 지난 수천 년 동안 대양 섬에서 일어난 생태 파괴의 규모는 최근에서야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이 번쩍 드는 확고한 깨달음이었다. 세계의 많은 부분이 생태학자들이 상상하는 모습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다시 말해 온전한 자연계의 구성을 보여주는 원시 상태가
아니라우리 사람 종이 아주 최근까지 진화해 온 전체 생태계의 치명적인 충격을 가했다는 사실로부터 더 이상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환경을 크게 남용한다고 해서 굳이 대량 벌목용 기계를 쓸 필요는 없다. 원시 사회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숱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인간은 스토스 올슨이 '지구 역사상 가장 신속하고 가장 심각한 생물학적 재앙의 하나'라고 부르는 일을 마구 몰아붙였다. 여기에 오스트레일리아와 아메리카에서의 대량 절멸까지 덧붙이면 호모 사피엔스는 멸종의 원인으로서 참으로 긴 역사를 갖춘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뒤로 한 채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우리 종 호모 사피엔스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지 그 구체적인 영향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가 코끼리가 같은 '거대한 개별 종의 손실'과 '전체적인 영향',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심각한 파괴에 직면해 있음을 확신한다. 나는 지금까지 과거에 인간이 미친 영향을 이야기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 엄습하고 있는 사태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그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초기 사회는 그러지 못했다. 정확한 역사적 조망을 통해 현재의 양식을 고찰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새로운 1천 년이 인간의 손에 의해 흩뿌려진 훌륭한 한 종의 피의 역사로 시작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인간의 무책임과 탐욕에 대한 구역질나는 증언이 될 것이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가능성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다행히 멸종을 향한 거센 돌진은 어느 정도 멈추었고 거기에는 내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다. 대량 살육을 중단시킨 것은 어렵고 불확실한 앞으로의 여정을 향한 첫 걸음일 뿐이다.
우리 자손들의 자손, 다시 그들의 자손에게 야생 코끼리가 주는 경외감(오늘날 우리가 그들에게 느끼는 것처럼)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어떨지는 순전히 이 여정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느냐에 달려 있다"
"아프리카코끼리는 5백만 년 전부터 2백만 년 전 사이, 플라이오세 어느 시기에 아프리카 대륙의 울창한 삼림에서 처음 진화했다. 현대 코끼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호모속 현대인을 유일한 후손으로 둔의 첫 출현과 거의 동시에 진화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컬하다. 홍적세 기간 동안 아프리카에서는 여러 장비류 종이 멸종, 아마도 환경의 변화 탓인 듯하다되었으며 홍적세가 끝날 무렵인 1만 년 전에는 매머드와 매스토돈이 종말을 고했다.
앞장에서 살펴본 바 그대로 이들은 어쩌면 사람의 손에 의해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지금은 아프리카코끼리와 인도코끼리만이 장비목의 유인한 대표로 남게 되었다. 사람과 코끼리는 적어도 다음의 관점에서는 거의 동등한 관계를 가지도록 운명지워졌다. 즉, 이 둘은 대략 같은 시기에 진화의 시련으로부터 출현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현대 세계에서 코끼리는 어디에 분포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들의 영토 범위를 인도와 서남 아시아의 일부 지역,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인구가 점점 영토를 잠식함으로써 코끼리들이 곤경에 처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저 현대 세계의 문제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기만 해도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곧 드러난다. 불과 수천 년 전만 해도 인도코끼리는 중국과 중동에까지 펼쳐진 아시아 대부분 지역의 생태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누렸다. 그리고 아프리카코끼리는 지금처럼 남부 아프리카에 작은 개체군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걸쳐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걷잡을 수 없는 '인구 팽창'과 '상아에 대한 갈망'이라는 두 힘이 치명적으로 결합된 결과 이들은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인간은 오랫동안 상아의 아름다움에 그리고 상상 속의 신비한 힘에매혹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조각상 독일의 포겔하트에서 나온 작은 말의 입상은 매머드의 엄니, 즉 상아를 파서 만든 것이었다. 이것은 중동과 이집트, 크레타, 그리스에 이르는 초기 문명의 일부로서 뚜렷이 억제할 수 없는 표현 형태의 시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기질을 고도의 예술로 발전시킨 것은 로마인들이었다 로마 사람들은 상아로 중요한 상징을 지닌 작은 입상을 만들었다.
이들은 상아로 실용적인 대상( 예컨대 묘지와 같은)을 장식했으며 커다란 상과 가구에 멋으로 상아를 놓아두었다. 또 상아 타일로 방에 선을 둘렀으며 심지어 화폐로 쓰기도 했다. 상아의 수요가 엄청나게 증가하자 코끼리 개체군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기원전 2세기 경 아프리카 북부와 아시아 동부의 분포 지역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코끼리들이 살해되었다. 로마인들은 상아에 대한 자신들의 열망이 상아를 지닌 동물들의 감소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더글러스 채드웍은 그의 명저 '코끼리의 운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와 비교해서 로마인들은 멀리 떨어진 지역의 야생 동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상아의 남획으로 코끼리가 사라져가는 동안 플리니우스는 여전히 코끼리의 주된 천적을 용이라고 쓰고 있었다." 실제로 다른 혈통의 용(역주: 인간을 가리킴)이 나라 밖에서 이 거대한 후피동물을 향해 치명적인 불기둥을 내뿜고 있었다. 당시 여타 앞선 문명들이 그랬던 것처럼 로마 제국 역시 또 다른 방식으로 코끼리를 이용했다. 막강한 코끼리의 힘은 건축과 수송에 쓰였으며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로 대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용도는 상아 수렵에 비하면 코끼리 개체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서식처 파괴면에서도 영향력이 크기 않았다. 한때 유라시아에 광범위하게 뻗어 있던 삼림 지대는 조각조각 동강나고 개간되었다. 다투어 출현하는 인간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목재 수요가 끊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생태적인 상황도 엄청나게 바뀐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 유라시아 지역과 이보다 더 최근의 아메리카 대륙에는 현대 산업 사회의 경제 발전이 빚어낸 결과물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 본질상 인공적이며 인위적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야생 동물 서식처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때 이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것이다."
"코끼리가 나무를 잘라내거나 어린 식물을 뿌리째 뽑는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파괴적인 힘에 깊은 인상을 받게 마련이다. 내가 몇 년 전의 암보셀리를 묘사했던 장면에서도 코끼리의 힘은 대량 파괴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생물학자들은 코끼리의 파괴력을 다른 측면, 즉 창조적인 힘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생각의 전환같지만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코끼리가 삼림의 나무를 파괴한 결과 관목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창조된다. 또 사바나 관목 지대에서의 관목 파괴는 풀이 자라날 공간을 마련해 준다.
울창한 삼림을 방문한 사람이면 누구나 아름드리 나무들이 치솟아 있는 그 웅장함에 감명을 받게 마련이다. 이 나무들에는 각종 착생 식물들이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둘러보면 주위는 온통 침묵뿐이다. 기묘한 정적이 그제서야 의식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큰 동물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그들은 거기에 없거나 있다 해도 고작 몇 종류밖에 되지 않는다. 숲과 초원이 펼쳐져 있건만 정작 풀과 나뭇잎을 뜯어먹는 동물은 없다.
이제 생물학자들은 다른 종이 번성할 수 있는 서식처를 창조하는 주인공이 바로 코끼리임을 깨닫고 있다. 새로 형성된 관목 지대에는 연한 잎을 먹는 동물들이, 새로 형성된 초원에는 풀을 뜯는 동물 종이 살아가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이러한 역할을 하는 종을 '쐐기돌 초식 동물'이라 부른다. 쐐기돌이 빠지면 아치가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쐐기돌 초식 동물이 멸종하면 생태계 역시 붕괴할 것이다.
위차터스랜드대학(요하네스버그에 있다)의 생물학자 노먼 오웬 스미스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 이러한 대규모 붕괴가 이미 발생했었다고 주장한다. 오웬 스미스는 1 만 년 전 홍적세 말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형 초식 동물이 멸종한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당시 멸종의 원인은 인간의 약탈 때문이었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말한다. 이때 사냥꾼들의 관심은 매스토돈과 곰포테륨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오웬 스미스는 사냥에 의해 희생되지 않았을 법한 다수의 작은 포유류와 조류 종들 역시 멸종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대형 초식 동물이 절멸하면서 탁 트였던 숲 속의 빈터는 다시 막혔고 관목 지대는 삼림으로 바뀌었으며 다양함을 자랑하던 초원은 획일적이고 지루한 초원으로 변해 버렸다. 이러한 식생의 변화는 화석상의 꽃가루 기록에서 구별된다. 화석 기록은 통해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작은 초식 동물이 살 수 있는 서식처를 한정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종의 절멸로 이어졌을 것이다. 오늘날 코끼리가 멸종한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도 부분적으로 이와 유사한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코끼리가 사라지면 풀이나 연한 잎을 뜯어먹는 동물들의 서식처는 풍부함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훨씬 적은 종만을 지탱할 수 있게 된다. 그 뚜렷한 예로 암보셀리의 북부 지역을 들 수 있다. 울창한 관목이 그 일대에 똑같이 펼쳐져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만일 끔찍하게도 통찰력의 부족이나 의지의 결여로 코끼리가 멸종한다면 더 많은 종이 그 뒤를 따라 진화의 망각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쐐기돌 초식 동물로서 코끼리가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그동안 상아 교역의 장래나 추려내기의 지혜 등등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에서 간과되어 왔다.
코끼리는 그저 멸종 위기에 놓인 한 종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보존의 기함으로서 단순히 우리의 의지(자연을 경외하고 보존하려는)를 검증하기 위한 도구처럼 인식되어서도 안된다. 코끼리의 생존에 아프리카 야생 동물의 엄청난 다양성을 이루고 있는 다른 수많은 종의 생존이 달려 있다. 이들은 모두 수백만 년의 진화를 통해 얻어진 우리의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진화생물학, 생태학, 고생물학에서의 새로운 통찰을 종합해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는 그저 역사의 우연한 산물일 뿐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우세한 종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우리의 영향력은 재앙이 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지금처럼 환경을 파괴한다면 이 세계의 종 절반 가량이 21세기 초에 멸종하기 시작할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 역시 역사 속의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멸종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종들을 보호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지닌다. 우리의 역할은 결코 자연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에. "
"사람의 정서는 지구상 생물의 시간 기준인 수억 년이 아니라 수십 년 혹은 몇 세대의 관점에 국한해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을 밟아가며 인류 문제와 씨름하다 보면 지구 역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하찮음이 동시에 드러난다. 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 분명히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종은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20세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진화생물학'과 '생태학'이라는 쌍둥이 과학은 온통 인류의 정신에 대해 확신을 준 생물관으로 물들여졌다. 이러한 관점은 위대한 자연학자 찰스 다윈과 위대한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의 혁명적이고도 강력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생물학과 지질학이라는 두 영역에서 한결같이 지구의 역사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느릿느릿 진행되었다고 주장했다.
깊은 협곡이나 높은 산 등 거대한 지질 구조물들은 작은 변화들이 일정하게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이며, 대륙의 표면과 깊은 바다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생물들이 살게 된 것도 모두 이 작은 변화들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생존자들은 타고난 우월함으로 멸종을 모면했다. 따라서 우리는 승리자의 후손이며 여기에서 위안을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초기 대량 멸종에서는 생존자의 우월함도 희생자의 열등함도 없었다. 분명히 없었다. 최근 굴드가 말했던 그대로 '지상 최대의 제비뽑기'가 행해졌으며 우리는 우연히 그 운좋은 승리자들 가운데 하나의 후손이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운좋은 승리자의 후손들과 이 세상을 공유하고 있다. 제비뽑기가 다시 행해진다면 승리자들이 또 바뀔지도 모른다. 그러면 현대 생물의 기초가 된 몸의 설계도 역시 달라질 것이다. 초기 멸종에서 사라졌던 기이한 생물 형태로 미루어 보아 이들 중
많은 수는 아주 색다른 유형일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생물 세계(우리 역시 그 일부를 차지하는)가 필연적이며 유일한 것이 아니라 무수히 있을 수 있는 세계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
"생태 군집의 구성원은 자연의 균형 속에서 서로 멋지게 평형을 이루며 살고 있지 않다. 군집의 모양과 행동의 상당 부분은 혼돈스런 상호 작용과 미리 준비된 설명을 허용치 않는 돌발적 특성(침입에 대한 저항력과 같은)에 의해 결정된다.
이전의 관점에 따르면 군집은 예측 가능하고 정적인 것이었다. 반면, 변화된 관점에서는 군집을 예측 불가능하고(심지어 신비스럽기까지 한) 동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동적인 상태는 현존 세계의 생물 다양성에 기여하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여기에 머문다.
직관에 반하는 이야기겠지만 꾸준한 변화(동적 상태)는 군집의 장기적인 안정을 가져오는 근원이다. 단기간의 변화를 차단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오히려 장기적으로 더 해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인간은 우리 주변의 자연 세계, 특히 우리 자신의 존재와 우리의 미래에 관하여 예측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진화생물학과 생태학 분야에 있어서 우리의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며,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역사의 우연한 산물에 불과하다.
현존 세계는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그리고 적어도 몇몇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의 즉각적인 이해를 벗어나는 힘에 영향받는 수많은 가능성의 장소이다. 이 세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확실한 면이 많다. 그러나 사실 이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하다. "
"우리는 역사의 우연한 산물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호모 사피엔스가 오늘날 지구상에서 가장 우세한 유일종이라는 데에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진화의 무대에 뒤늦게, 지구의 생물 다양성이 거의 최고의 정점에 달한 시기에 등장했다. 그리고 10장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가는 곳마다 생물 다양성을 황폐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우리는 이성과 통찰력의 축복을 받아 21세기를 본질적인 인공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다. 기술의 창조는 물질적 안락을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으며, 생활의 여가와 레저는 전례없는 예술적 창조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이성과 통찰력은 전례없는 지구 자원(생물 자원과 천연 자원)의 무분별한 개발을 막을 만큼 깊지는 못했다."
"1979 년 옥스퍼드대학의 생태학자 노먼 마이어는 그의 책 '가라앉는 방주'에서 삼림 개간의 절박한 위기에 관하여 논한 바 있다. 그는 이 주제에 폭넓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측정한 바에 의하면 매년 2%씩의 속도로 나무가 계속 베어져나가고 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2천 년 경에는 모든 종의 4분의 1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1세기 뒤에는 나머지 종의 3분의 1이 사망자 명단에 보태질 것이다." '가라앉는 방주'가 출판되고 나서 15년이 흐른 후 그 실제적인 수를 둘러싸고 한바탕 논쟁이 일었다.
과연 그가 주장한 속도대로 삼림이 사라지고 있는가? 설령 그렇다 해도 정말로 전체 종의 50%나 사라지게 될까? 마이어의,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예언은 처음에는 공감을 받았다. 그리고 생물학자들과 정치가들 사이에 일종의 순수한 공포심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비중있는 인물들의 입에서는 엄숙한 말들이 계속 흘러나왔다.
한편, 1986 년 9월 워싱턴에서 생물 다양성 회의가 열렸다. 지구 클럽은 이 회의 초반부에 발표된 글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 바 있다. "종의 멸종 위기는 핵전쟁에 버금가는 문명의 위협이다." 최근 발표된 미 국립 과학아카데미와 런던 왕립 학회의 공동 성명은 이러한 경고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환경 변화의 전반적인 속도는 의심할 여지 없이 최근의 인구 팽창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우리 지구의 미래는 환경 변화와 인구 팽창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가에 달려 있다."
"스튜어트 핌의 보고에 따르면 태평양에서만 해마다 거의 1종씩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 한다. 핌의 야외 연구는 하와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의 전문적인 관심 대상은 바로 새이다. 하와이 제도는 관광객들의 눈에 열대의 낙원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섬들은 생태학자들에게 있어 최근의 비극적인 멸종의 상혼을 지닌 곳으로 인식된다. 하와이 제도에 서식했던 조류 종 가운데 약 절반 가량이 인간과 첫 대면한 이후 멸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극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1백35종 가량의 새들 가운데 오직 11종만이 21세기까지 생존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중에서(2)
인간의 역사는 지난 1만년경 부터 급진적으로 변화되어왔다. 우리가 주식으로 삼는 곡류와 육류들이... 수 만년전부터 전 세계에 고루 존재했던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속에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그 지식과 문화들, 그리고 사람자체가 전파되었던 것이다.
현재도 그러하다.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전 세계로 퍼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현대의 문제점은 식물과 동물의 종자, 생산, 유통자체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유기농업 역시 자본의 논리를 피할수 없는 현실... 경쟁과 집적에서 결국 대량화 기계화를 초래하고... 독점적인 유기농만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현대의 또 하나의 큰 문제점은 몬산토를 필두로한 유전공학에 의해 변형된 식물과 동물의 생산이다... 핵무기, 핵발전소 문제와 더불어 엄청난 사건들을 야기시킬지 모른다...
사족)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독자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인용한 건지는 모르지만, '자가촉매작용'이 현대물리의 한 분야인 Chaos이론의 프랙탈과 자기반복이론과 유사하다는데 놀라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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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일단 식량이 생산된후에는 이웃한 수렵민들이 그 결과를 보면서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가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수렵채집민들이 이웃의 식량생산체계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어떤 경우에는 그 중에서 몇가지 요소만을 골라서 받아 들였다. 또 어떤 경우에는 식량생산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수렵채집민 만으로서만 남아있었다.
유럽동남부인들은 B.C 6000년경부터 서넘아시아의 곡류,콩류,가축을 신속히 받아들였다. 이는 그 지역의 생산성이 비교적 낮아서 경쟁력이 적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랑스남부,스페인, 이탈리아는 식량생산이 서서히 도입되었다
아시아 본토의 집야적인 식량생산이 일본에 도입된 속도도 역시 느리고 점진적이었다
농경을 시작한다는 결정이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다시 말해서 그 이전에는 먹거리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식량생산과 수렵채집은 서로 경쟁하는 '대안적 방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지난 10000년동안 나타난 지배적인 결과는 대체로 수렵채집에서 식량생산으로의 전환이었다. 따라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수렵채집보다 식량생산이 더 커지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주요원인은 네가지로 추려낼수 있는데, 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주로 그것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놓고 벌어진다.
1. 야생먹거리 감소 : 기후변화와 인간사냥꾼들의 기술과 수효증가로 대형 포유류가 대부분 멸종, 거대 조류 멸종
2. 작물화 할 수있는 야생식물이 증가: 생산성 향상.
3. 식량생산에 필요한 기술, 도구,저장시설의 계속된 발전 : 누적화의 토대 마련
4. 인구밀도증가와 식량생산발원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적인 관계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 식량생산의 도입은 '자가촉매작용(일단 시작된후에는 스스로 촉매작용을 되풀이하여 점점 더 가속화되는 현상)' 이라는 것의 한예가 된다....
식량생산자들은 인구가 훨씬 조밀했기 때문에 굳이 기술, 병원균,직업군인등등 식량생산과 관련된 그밖의 이점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순전히 숫자만 가지고도 수렵채집민들을 몰아내거나 몰살시킬수 있었다...
현재도 그러하다.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이 전 세계로 퍼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현대의 문제점은 식물과 동물의 종자, 생산, 유통자체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유기농업 역시 자본의 논리를 피할수 없는 현실... 경쟁과 집적에서 결국 대량화 기계화를 초래하고... 독점적인 유기농만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현대의 또 하나의 큰 문제점은 몬산토를 필두로한 유전공학에 의해 변형된 식물과 동물의 생산이다... 핵무기, 핵발전소 문제와 더불어 엄청난 사건들을 야기시킬지 모른다...
사족)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독자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인용한 건지는 모르지만, '자가촉매작용'이 현대물리의 한 분야인 Chaos이론의 프랙탈과 자기반복이론과 유사하다는데 놀라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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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드 다이아몬드 [총,균,쇠]중에서(2)
"대륙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일단 식량이 생산된후에는 이웃한 수렵민들이 그 결과를 보면서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가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수렵채집민들이 이웃의 식량생산체계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어떤 경우에는 그 중에서 몇가지 요소만을 골라서 받아 들였다. 또 어떤 경우에는 식량생산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수렵채집민 만으로서만 남아있었다.
유럽동남부인들은 B.C 6000년경부터 서넘아시아의 곡류,콩류,가축을 신속히 받아들였다. 이는 그 지역의 생산성이 비교적 낮아서 경쟁력이 적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프랑스남부,스페인, 이탈리아는 식량생산이 서서히 도입되었다
아시아 본토의 집야적인 식량생산이 일본에 도입된 속도도 역시 느리고 점진적이었다
농경을 시작한다는 결정이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다시 말해서 그 이전에는 먹거리를 구할 방법이 없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식량생산과 수렵채집은 서로 경쟁하는 '대안적 방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지난 10000년동안 나타난 지배적인 결과는 대체로 수렵채집에서 식량생산으로의 전환이었다. 따라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수렵채집보다 식량생산이 더 커지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주요원인은 네가지로 추려낼수 있는데, 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주로 그것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놓고 벌어진다.
1. 야생먹거리 감소 : 기후변화와 인간사냥꾼들의 기술과 수효증가로 대형 포유류가 대부분 멸종, 거대 조류 멸종
2. 작물화 할 수있는 야생식물이 증가: 생산성 향상.
3. 식량생산에 필요한 기술, 도구,저장시설의 계속된 발전 : 누적화의 토대 마련
4. 인구밀도증가와 식량생산발원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적인 관계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 식량생산의 도입은 '자가촉매작용(일단 시작된후에는 스스로 촉매작용을 되풀이하여 점점 더 가속화되는 현상)' 이라는 것의 한예가 된다....
식량생산자들은 인구가 훨씬 조밀했기 때문에 굳이 기술, 병원균,직업군인등등 식량생산과 관련된 그밖의 이점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순전히 숫자만 가지고도 수렵채집민들을 몰아내거나 몰살시킬수 있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중에서(1)
종교들마다 먹지 말아야할 음식, 특히 육류(포유류)가 있다는 것은 참 재미있다.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안먹는다길래, 돼지의 원시종을 찾아보니 서남아시아와 중국으로 나오니^^ 더 오리무중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글은 참 재미있다. 자연과학적 지식이 충분히 녹아든 적절한 예들에서 "커 그럴수도 있겠구먼^^" 마음속으로 웃음을 지을수 있다.
******************************
"오늘날에도 볼수 있듯이 음식의 선호순위는 사람들의 각각의 생활방식에 부여하는 상대적가치에 따라서도 크게 좌우된다. 19세기 미국서부에서는 소를 기르는 사람, 양을 기르는 사람, 농사를 짓는 사람이 모두 서로를 멸시했다.
마찬가지로 인류역사를 통틀어 농경민들은 언제나 수렵채집민을 원시적이라는 이유로 경멸했고 수렵채집민들은 농경민을 무지하다면서 경멸했으며 목축민들은 둘다 경멸했다. 개인이 먹거리를 어떻게 얻을것인지를 선택하려고 할때마다 그같은 요소들이 작용하는 것이다"
"모든 농작물은 야생식물종에서 생겨났다. 그렇다면 야생식물들은 어떻게 농작물이 되었을까? 이 문제가 특히 알쏭달쏭해지는 것은, 많은 농작물이 그렇듯 야생조상이 아몬드처럼 치명적(독이 있다는 말)이거나 맛이 안좋은 경우, 또는 옥수수처럼 농작물과 야생조상의 생김새가 서로 판이하게 다른 경우다. 도대체 어느 혈거인이 식물을 '작물화'할 생각을 했으며 그일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식물의 작물화란 곧 어떤식물을 재배함으로써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간소비자에게 더 유용하도록 야생조상을 유전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라 정의할 수있다."
" 무엇때문에 어떤 식물들은 다른식물들보다 작물화하기가 훨씬 쉽거나 더 매력적으로 보였을까? 어째서 올리브나무는 석기시대의 농경민들에게 굴복했고, 또 왜 떡갈나무는 오늘날의 뛰어난 농경학자들조차 좌절시키고 있는 것일까?"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글은 참 재미있다. 자연과학적 지식이 충분히 녹아든 적절한 예들에서 "커 그럴수도 있겠구먼^^" 마음속으로 웃음을 지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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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볼수 있듯이 음식의 선호순위는 사람들의 각각의 생활방식에 부여하는 상대적가치에 따라서도 크게 좌우된다. 19세기 미국서부에서는 소를 기르는 사람, 양을 기르는 사람, 농사를 짓는 사람이 모두 서로를 멸시했다.
마찬가지로 인류역사를 통틀어 농경민들은 언제나 수렵채집민을 원시적이라는 이유로 경멸했고 수렵채집민들은 농경민을 무지하다면서 경멸했으며 목축민들은 둘다 경멸했다. 개인이 먹거리를 어떻게 얻을것인지를 선택하려고 할때마다 그같은 요소들이 작용하는 것이다"
"모든 농작물은 야생식물종에서 생겨났다. 그렇다면 야생식물들은 어떻게 농작물이 되었을까? 이 문제가 특히 알쏭달쏭해지는 것은, 많은 농작물이 그렇듯 야생조상이 아몬드처럼 치명적(독이 있다는 말)이거나 맛이 안좋은 경우, 또는 옥수수처럼 농작물과 야생조상의 생김새가 서로 판이하게 다른 경우다. 도대체 어느 혈거인이 식물을 '작물화'할 생각을 했으며 그일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식물의 작물화란 곧 어떤식물을 재배함으로써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간소비자에게 더 유용하도록 야생조상을 유전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라 정의할 수있다."
" 무엇때문에 어떤 식물들은 다른식물들보다 작물화하기가 훨씬 쉽거나 더 매력적으로 보였을까? 어째서 올리브나무는 석기시대의 농경민들에게 굴복했고, 또 왜 떡갈나무는 오늘날의 뛰어난 농경학자들조차 좌절시키고 있는 것일까?"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유전자]중에서(2)
밈과 유전자의 유사점
이 책의 전체를 통하여 나는 유전자를 의식을 가진 목적 지향적인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유전자는 맹목적인 자연 선택의 작용에 의해 마치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인 양 만들어져 있다. 또한 목적 의식을 전제로 한 표현으로 유전자를 설명하는 편이 편리하다.
예컨데 "유전자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가시의 사본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표현할 경우 실제의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그 효과를 볼 수 있는 유전자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수를 결과적으로 증가시킬 수가 있는 거동을 하는 유전자다."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존을 위해 목적 지향적으로 일하는 능동적인 존재로서 유전자를 생각하는 것이 편리했던 것처럼 밈에 관해서도 같게 생각하면 편리하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표현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목적이란 생각은 어느 경우에서나 단순한 은유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전자의 경우 이 은유가 어떻게 유용했었는가는 이미 본 바대로이다.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은유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나서 유전자에 대해 '이기적인'이나 '잔인한'이라든가 하는 형용사까지 쓸 정도이다. 이들 경우와 똑같은 심정으로 이기적인 밈이나 잔인한 밈을 물색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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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의 탁월한 과학적 사유방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엇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목적론적인 세계관, 당위적 세계관은 따지고 보면 이원론적 세계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를 꿈꾸는 일이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나, 그 유토피아의 상들은 개인, 집단마다 틀리다. 자신들만의 유토피아 또는 신이 진정한 유토피아,신이라는 오만함의 근거는 무엇일까?
도킨스의 다음 구절을 인용해 본다.
" 맹신은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다른 신을 믿고 있으면 아니, 만약 사람이 같은 신을 믿는데 다른 의식을 쓴다면 다만 그것만으로도 맹신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십자가에 매단다, 화형을 한다, 십자군의 검으로 찌른다. 베이루트 노상에서 사살한다, 벨파스트의 술집에 있는 것을 폭탄으로 날린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이다. 맹신이라는 밈은 몸에 밴 잔인한 방법으로 번식해 가고 있다. 애국적, 정치적 맹신이든, 종교적 맹신이든 상기의 성질은 똑같은 것이다"
최재천교수님의 개미제국 중에서
최재천교수님의 개미제국 중에서
오천만년 전통의 농사꾼 :
잎꾼개미의 거대한 지하버섯농장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했지만 인류가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만년전쯤이라고 한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우리인간을 이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한 종으로 만들어 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수렵채취시기에는 수적으로 그다지 우세한 종이 아니었던 인류가 농경사회에 접어들면서부터 또 그 후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여 급기야 오늘날에는 인구증가를 막기 위해 고민해야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인간은 과연 어떻게 농경이란 엄청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산과 들에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열매나 씨앗들을 찾아먹다가 어떻게 그들을 땅에 심어 길러 먹을 생각을하게 되었을까?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는것같다.
최초의 농경사회
그러나 최근 미국 코넬대학의 곤충학자들을 주축으로 수행된 연구에 의하면 인간보다 무려 5천만년전에 이미 농사를 시작한 동물들이 있었다. 아메리카대륙의 열대지방 전역에 걸쳐 서식하는이른바 잎꾼개미들이 바로 지구 최초의 농사꾼들이다. 중남미의 열대림에 가면 흔히 제가끔 자기몸보다도 더 커다란 이파리를 입에 물고 집으로 돌아가는 잎꾼개미들의 긴 행렬을 볼 수 있다.이러한 잎꾼개미들의 행렬은 때로 수백미터에 달하는 장관을 이룬다. 필자는 지금도 1984년 여름중미에 있는 코스타리카의 라셀바지방 열대림속에서 난생 처음으로 잎꾼개미들의 행렬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잊을수가 없다. 시각이 끊이는 곳까지 길게 이어진 그들의 행렬을 멀리서 바라보노라면 어느새 작은 개미들의 모습은 간데없고 크고 작은 이파리들만이 언뜻언뜻 숲속으로 새어드는 햇빛에 반사되어 출렁이며 흘러간다.
이렇게 수확해 온 이파리들은 그대로 개미들의 식탁에 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이 경작하는 독특한 종류의 버섯을 키우는 배양매체로 쓰인다. 개미들은 버섯들에게 그들 혼자힘으로는 구경도 해보지 못할 양의 식물체를 먹이로 제공하고 버섯들은 그것을 먹으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단백질과 당분이 담뿍 든 균사체를 만들어 개미들에게 제공한다. 미국 콜롬비아대학에 있는 필자의 동료 웨터러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잎꾼개미들은 이파리에서 나오는 식물의 즙도 일부 섭취하지만 대부분의 잎들은 버섯농장의 거름으로 쓰인다.
지상엔 파괴, 지하엔 건설
지구상에는 현재 약 200여종의 개미들이 각기 크고 작은 버섯농장들을 경영하고 있다. 이들 버섯개미중에는 동물의 분비물이나 썩은 시체들위에 버섯을 키우는 것들도 있고 잎꾼개미들처럼 나뭇잎을 거둬들여 버섯농장을 경영하는 것들도 있다. 필자가 코스타리카의 라셀바지역에서 관찰한앱테로스티그마(Apterostigma)버섯개미는 아이들 주먹만한 곰팡이 주머니를 만들어 나무둥치에 매달고 그 속에서 살고 있었다. 주머니의 중간쯤 작은 구멍을 뚫고 그리로 동물 찌꺼기를 물어들여 버섯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들 중 한 군락을 열어보니 잎꾼개미와는 달리 그들의 여왕개미는일개미들에 비해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만 가슴이 더 두툼할 뿐이었다.버섯개미들중 규모나 기술면에서 가장 크고 발달된 농장을 운영하는 것들은 애타(Atta)와 애크로머맥스(Acormyrmex)라는 속의 잎꾼개미들이다. 이 두속에는 약 40종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두 미국의 루이지애나주와 텍사스주로부터 남미의 아르헨티나에 걸쳐 분포한다. 개미들의버섯농장이 왜 신대륙에서만 왕성하게 발달하게 되었는지는 대단히 흥미로운 연구과제이다.
잎꾼개미들은 마치 파괴와 부흥을 상징하는 힌두교의 신 시바와도 같다. 우리나라 시골 마을어 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큰 정자나무 정도의 나무도 일단 잎꾼개미들이 덤벼들어 잎을 따들이기시작하면 그저 한 이틀이면 벌거숭이가 되고 만다. 아프리카의 초원을 휩쓸며 온갖 식물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코끼리떼의 왕성한 식욕도 잎꾼개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중남미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온대지방 사람들처럼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중의 하나도 바로이 잎꾼개미들 때문이다. 오랫동안 정성스레 가꿔온 밭이 잎꾼개미들에게 걸리면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쑥대밭이 되고 만다. 생태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중남미 열대림에서 잎꾼개미들에 의해 소비되는 잎의 양은 전체의 약 15프로에 달한다.
그러나 이렇듯 무자비한 약탁자들이 땅속으로 들어가면 더할 수 없이 양순한 농부가 된
다. 고도로 조직화된 버섯농장에서 제가끔 자기 부서를 지키며 맡은 바 임무를 성실하게 수
행한다. 지상의 파괴가 지하에서는 에덴 동산으로 부활하는 셈이다. 생태계 전체를 놓고 보
아도 사실상 잎꾼개미들의 파괴는 단순히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 나라와 같은 온대
지방에서 지렁이들이 땅을 일구어 다시 비옥하게 만드는 것처럼 열대에서는 이들 잎꾼개미
들이 땅을 기름지게 한다. 잎꾼개미 군락 하나가 파엎는 흙의 양은 평균 20 세제곱 센티미
터가 넘으며 무게로 따지면 약 44톤이나 된다. 일개미 한 마리마다 자기 몸무게의 너댓 배
나 되는 흙덩이들을 적어도 10억 번 이상 굴 밖으로 끌어냈다는 이야기다. 잎꾼개미들이 하
는 일의 양을 사람에 비유하면 마치 만리장성을 쌓는 격이다.
버섯농장의 조립라인
잎꾼개미의 사회는 고도로 조직화된 계급사회다. 몸길이가 불과 2-3mm에 지나지 않는 농장의 정원사개미로부터 무려 300배 가량이나 무겁고 머리의 폭도 6mm나 되는 병정개미까지 몸의 크기에 따라 네 계급의 일개미들로 구성되어 있다. 병정개미들은 말 그대로 잎꾼개미 사회에서 국방을 담당하는 군인들이다. 적이 나타나면 지체 없이 출동하여 그들의 막강한 이빨로 가차없이 물어뜯는다. 그들의 이빨은 사람의 살갗은 물론 웬만한 가죽 정도는 간단히 찢어버린다. 필자도 언젠가 파나마에서 한 잎꾼개미 군락을 파헤치다 어느 병정개미에게 왼쪽 새끼 손가락을 물렸는데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었으나 출혈이 적지 않아 한동안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손가락에 매달린 개미를 떼어내려 잡아당겼더니 그만 목이 끊기고 말았다. 어찌나 악착같이 물고 있었는지 머리는 그대로 남고 몸만 떨어져 나간 것이다.병정개미보다 한 계급 낮은 일개미들이 바로 이파리를 자르고 그들을 운반해 오는 잎꾼들이다. 한쪽 뒷다리로 잎의 가장자리를 잡고 그곳을 축으로 하여 날카로운 이빨을 마치 전기식칼처럼 사용하여 동그랗게 자른 뒤 집으로 운반한다. 사실 이들이 이파리를 물고 이동하는 속도는 걸을을 재촉하는 정도가 아니다. 사람에 비유하면 약 15km나 되는 귀가길을 시
속 24km의 속력으로 달리는 셈이다. 마라톤 선수를 방불케 하는 속력이다. 더욱 놀라운 것
은 300kg이 넘는 짐을 잎에 물고 달린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마라톤은 폭우가 쏟아지는 때
를 제외하곤 거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된다.
잎꾼들이 이파리를 굴 속으로 운반해 오면 그들보다 조금 작은 일개미들이 기다리고 있다
가 그 잎들을 받아 톱날같은 이빨로 잘게 썬다. 그러고 나면 이번엔 더 작은 일개미들이 잘게 썰린 잎조각들을 잘근잘근 씹어 마치 종이를 제작할 때 쓰는 펄프처럼 만든 다음 효소가 담뿍 들어 있는 배설물과 잘 섞는다. 이렇듯 잘 반죽된 <잎죽>은 다음 방으로 옮겨져 미리 깔아둔 마른 잎들 위에 골고루 뿌려진다. 다음엔 조금 더 작은 일개미들이 이미 버섯을 키우고 있던 다른 방에서 버섯을 조금씩 떼어다 이파리 반죽 위에 가지런히 심는다. 새로운 배지에 옮겨진 버섯들은 제철 만난 들풀마냥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다. 버섯의 성장속도가 빠른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럽 사람들은 버섯을 일컬어 신이 주는 선물이라 했다. 밤새 비가 내린 후 어젠 흔적도 없던 곳에 쑥쑥 솟아오른 버섯들을 보면 정말 밤새천사들이 내려와 심어놓고 간 선물인 듯싶다.
버섯농장의 정원사들은 잎꾼개미 사회에서 가장 몸집이 작은 꼬마 일개미들이다. 그들은 농장 주변을 늘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은 물론 김매는 일, 수확해들이는 일 등 실제 농사일을 도맡아 한다. 잎을 잘라 저장하는 과정까지 잎꾼개미들의 작업현장은 우리 인간사회의 현대식 제조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조립 라인을 방불케 한다. 몸의 크기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각자 맡은 바 임무에만 몰두하는 잎꾼개미들이야말로 분업의 극치라 하겠다.
씨버섯을 혼인 지참금으로
여왕개미가 새 살림을 차릴 땐 일개미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버섯농장의 종자는 어디서 구해오는 것일까? 인간 사회의 여러 문화권에서 여자가 시집을 갈때 친정으로부터 지참금이나 다른 소중한 물건을 품에 안고 가듯 잎꾼개미의 여왕들은 혼인비행을 하기 위해 어머니의 집을 떠날 때 씨버섯 한 줌을 입 속에 있는 조그만 주머니에 넣어둔다. 수개미들과 교미를 마친 후 좋은 터를 골라 굴을 파고 새 살림을 차리자마자 여왕개미는 씨버섯을 뱉어 새 농장을 일구기 시작한다. 이렇게 마련한 조그마한 정원이 일개미들이 태어나 외부로부터 잎을 물어들이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성장하여 거대한 규모의 농장으로 변신하는 것이다.이처럼 어머니로부터 딸로 이어진 모계사회의 전통 덕택에 미국 남부로부터 중남미 대륙전역에 걸쳐 분포하는 잎꾼개미 군락 모두가 같은 종류의 버섯을 재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최근 미국 코넬 대학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다. DNA 분석법을 이용하여 조사한 결과 잎꾼개미들과 버섯과의 관계는 거의 2천5백만 년 전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마치 유산균을 대대로 물려받으며 요구르트를 생산하는 것과 흡사하다. 초창기의 잎꾼개미들은 집주변에 자라던 버섯들을 이것저것 길러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가장 훌륭한 품종의 버섯을 찾은 후에는 오로지 그 한 품종만을 경작해온 것이다. "신토불이"도 이쯤은 돼
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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