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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선생님 '쓰러진 자의 꿈' 중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뒤를 돌아다 봐야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
바로 그때에 어울리는 시인이라고 할까? 신경림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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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것이 너무나 빨리 뒤엉키고 쓰러진다. 그 것들 가운데는 쓰러지고 뒤바뀌어 마땅한 것도 적지 않 지만, 값지고 소중한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내가 왜 모르랴.
그렇더라도 거기 매달려 뒤바뀌고 쓰러지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앟을만큼 나는 미련하지는 않다.공연히 거센 체하는 허풍스러운 몸짓과 꾸민 목소리는 이제 정말 역겹다. 이런때일수록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올바른 목소리를 가지는 일이 중요하리라.  허지만 나 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하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르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시를 가지고 할 일이 더많아졌다는 생각이다.
                                    93년 10월
                                 신 경 림 "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들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것이 다 사람들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안에서 밖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을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쓰러질 것은 쓰러져야 한다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뽑힐 것은 뽑혀야 한다
 그리하여 빈 들판을 어둠만이 덮을 때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죽음만이 머무를 때
 비로소 보게 되리라 들판 끝을 붉게 물들이는 빛을
 절망의 끝에서 불끈 솟는 높고 큰 힘을



 먼   길

 버릴 것은 버리고 줄일 것은 줄이자
 아까울 것 없다 자를 것은 자르자
 어둡고 먼 길을 떠나야 하니까
 다가오는 어둠 끝내 밝지 않으리라
 생쥐들 설치는 것쯤 거들떠도 볼 것 없다
 불어닥칠 눈보라와 비바람 이겨내자면
 겉에 걸친 것 붙은 것 몽땅 떨쳐버려야지
 간편한 맨몸으로만 꺽이지도 지치지도 않고
 먼 길 끝까지 갈 수 있지 않겠느냐
 다 버리고 가지와 몸통만이 남거든
 그래 나서자 젊은 나무들아
 오직 맨몸으로 단단한 맨몸으로
 외롭고 험한 밤길을 가기 위하여





나무를 위하여 

   
어둠이 오는 것이 왜 두렵지 않으랴
불어닥치는 비바람이 왜 무섭지 않으랴
잎들 더러 썩고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가지들 휘고 꺽이는 비바람 속에서
보인다 꼭 잡은 너희들 작은 손들이
손을 타고 흐르는 숨죽인 흐느낌이
어둠과 비바람까지도 삭여서
더 단단히 뿌리와 몬통을 키운다면
너희 왜 모르랴 밝는 날 어깨와 가슴에
더 많은 꽃과 열매를 달게 되리라는 걸
산바람 바닷바람보다도 짓궂은 이웃들의
비웃음과 발길질이 더 아프고 서러워  
산비알과 바위너설에서 목 움추린 나무들아
다시 고개 들고 절로 터져나올 잎과 꽃으로
숲과 들판에 떼지어 설 나무들아





 고향에서 하룻밤을 묶으며 

   
옛 친구와 벌이는 술판이 늘 즐겁지만은 않다
안좋은 세월 다 보내고 놓치고 늘그막에
면사무소 앞에 다방을 차리고 들어앉아
젊은 애들 잡고 우스개나 던지는 친구야
활개짓으로 세상을 떠돌다가 돌아와 산허리에서
닭을 치는 것으로 바람을 잡은 친구야
너희 작은 행복 자잘한 꿈을 알 리 없는
내 애기야 끝없이 겉돌기만 하겠지
서둘러 술자리를 파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와
너희 땀과 눈물이 섞인 강물을 들여다본다
세상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고
사람살이란 모이며 흩어지며 흘러가는 것이라고
부질없는 혼잣말은 해서 무엇하랴
강물에 비친 내 얼굴만 달보다 더 섧구나



태풍이 지나가는 저녘 들판에서 


사마귀와 메뚜기가 물고 뜯고 싸우고 있다
방아깨비와 찌르레기가 여름내 가으내
내 잘났다 네 잘났다 다투고 있다
뉘 알았으랴 그때
하늘과 땅을 휩쓰는 비와 바람이 몰아쳐
사흘밤 사흘낮을 불다 가리라고
이제 들판에는 그것들
부러진 날개죽지만이 흩어져 있다
토막난 다리와 몸통만이 남아 있다

태풍이 지나간 저녘 들판에 서보아라
누가 감히 장담하랴
사람의 일 또한 이와 같지 않으리라고



댐을 보며 

  
강물이 힘차게 달려와서는
댄에 와 부딪쳐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다시 파도를 이루어 헐떡이며 달려오지만
또 댐에 부딪쳐 맥없이 깨어진다.
깨어진 물살들은 댐 아래를 맴돌며 운다.
흐르지 못하는 답답함으로
댐을 뛰어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소리내어 운다.

댐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어디 강물 뿐이랴,
강물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른다.
하면서도 사람들은 왜 모르고 있는 것일까,
댐을 뛰어넘자고 깨어부수자고 달려온
그들 자신이 어느새 댐이 되어 서 있다는 것을.
파도를 이루어 뒤쫓아오는 강물을
댐이 되어 온몸으로 막고 있다는 것을.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이제 저 자신이라는 것을.



 거인의 나라 

 모두들 큰 소리로만 말하고
 큰 소리만 듣는다
 큰 것만 보고 큰 것만이 보인다
 모두들 큰 것만 바라고
 큰 소리만 좇는다
 그리하여 큰 것들이 하늘을 가리고
 큰 소리가 땅을 뒤덮었다
 작은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아무도 듣지를 않는
 작은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보지를 않는
 그래서 작은 것 작은 소리는
 싹 쓸어 없어져버린 아아
 우리들의 나라 거인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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