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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무엇을 할것인가' 중에서


오늘 한겨레21기사중에서...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2875.html



속까지 붉은 토마토당, 네덜란드 총선 돌풍 [2012.09.10 제927호]
[장석준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지속적 유럽통합 비판,
끈질긴 풀뿌리 정치 일궈온 네덜란드 사회당
노동당 젖히고 우파 자유민주인민당과 총선 1당 놓고 박빙 승부



다시 좌파의 근본을 생각케 하다
사회당이 이번 총선에서 내건 핵심 정책은 긴축정책 중단과 복지투자 확대다. 이들 역시 정부 재정의 일정한 삭감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들이 보기에 가위질이 필요한 것은 복지 예산이 아니다. 비효율적인 관료 기구를 손보는 게 우선이다. 국방비도 줄여야 한다. 그리고 고소득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한다. 반면 위기를 극복하려면 공공투자를 늘려야 한다. 사회당은 그 대상으로 주거, 에너지 절약, 환경 개선, 공공 교통, 보건 그리고 교육을 제시한다. 사회당의 이런 공약이 지금 복지 축소에 반대하는 네덜란드 민심을 결집시키고 있다.
하지만 사회당의 힘은 정책에만 있지는 않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다름 아닌 이들의 정치활동 방식이다. 사실 68세대가 만든 정당치고 별로 성공한 사례가 없다. 좌파보다는 ‘녹색’을 강조한 독일 녹색당 정도가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 그런데 네덜란드 사회당은 좌파 정체성을 분명히 하며 성공한 또 다른 희귀한 사례다. 그럴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이들의 끈질긴 풀뿌리 정치활동이 있었다.
아직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이던 시절부터 이들은 지역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들은 가톨릭 성향의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지역 차원의 정치 쟁점에 대해 지속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주류 거대 정당들이 중앙정부의 권력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상황에서 신생 사회당의 이런 활동 방식은 유권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사회당은 차츰 지방의회 내에 진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들의 접근법도 철저한 풀뿌리 방식이었다. 노동당은 노총의 조직적 지지를 받았지만 사회당은 그렇지 못했다. 사회당은 이런 약점을 노동자 당원들의 활발한 실천을 통해 극복해나갔다.
사회당의 독특한 성장사는 주요 지도자들의 이력에 뚜렷이 새겨 있다. 2008년까지 당 대표를 지내며 오랫동안 당의 얼굴 노릇을 해온 얀 마레이니선은 노동자 출신이다. 그의 정치 이력은 24살 때 지방의원에 당선된 것에서 시작됐다. 이후 그는 17년간이나 지방정치 무대에서 활동했고 이를 바탕으로 1994년 사회당 최초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현재 당 대표로서 선거운동을 이끌고 있는 에밀 루머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의 전직은 초등학교 교사다. 2002년까지도 학교 현장에 있었다. 그러면서 1994년부터 사회당 소속 지방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런 그가 외치는 ‘교육투자 확대’ 공약은 결코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사회당의 이런 당문화에 이 당의 저력이 있다고 지적한다. 네덜란드의 인구 규모에서 이 당의 4만6천여 당원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더구나 사회당원들은 어느 정당의 당원들보다 일상활동에 적극적이다. 사회당 지역조직들이 이런 당원 활동의 구심 역할을 한다. 사회당 지역조직들은 당원들이 참여하는 지역 사회운동을 조직할 뿐만 아니라 한 세기 전 초기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역센터(‘민중의 집’)를 건설해 노동자들의 일상생활에 접근한다. 이 모든 게 실은 노동당 같은 오래된 정당들이 언제부턴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좌파 정당의 본래 모습이다.



기사를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본다...

레닌의 100여년이 넘은 이글이 왜 이리 현재의 모습같아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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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 무엇을 할것인가 -  중에서


" 도대체 왜 러시아 노동자들은 인민에 대한 경찰의 야만적인 대우, 종교적 분파에 대한 박해, 농민에 대한 체형, 도리에 어긋난 검열제도, 순수문화사업에 대한 탄압등에 반응하는 활동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경제투쟁이 노동자들을 자극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감지할수 있는 결과물을 약속하였지 않았기 때문인가? 이러한 활동은 긍정적인것이라고는 조금도 가져다 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되풀이 하지만 이러한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해당되지도 않는곳에 비난을 퍼붓는 것이며, 자신의 속물적 실리주의를 노동대중에게 전가시키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대중운동에 뒤쳐져있는 우리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치욕적인 폭압에 대해서 아주 광범위하고 뚜렷하고 신속한 폭로를 아직도 조직화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이제까지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가능한 모든문제에 대해 신속한 폭로를 제시했다고 할만한 일들을 아무것도 하지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중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이러한 '정치폭로'를 우리의 본분으로 인정하지 않고... 우리의 미비함과 후진성을 정당화하며 우상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이 호우잉 사람아 아 사람아!(2)


다이 호우잉... 엄청난 내공에 여성의 섬세함까지...거기에 신영복 선생님의 번역...
맑스를 다시 읽는 것만큼이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발췌된 부분들이 소설속의 누가 한말일까 생각 해보는 묘미도 있다.

소설의 내용과는 많이 다르긴 하지만 10여년 정도의 중국의 자화상을 그린 유가신감독의 첨밀밀이 떠 오른다... 머 물론 장만옥이 떠오르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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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아 사람아! 제 1 장 [저마다의 진실] 중에서



"손 군, 세계관을 완전히 개조하지 않으면 안되네. 자네에겐 18,19세기의 부르주아 문학의 영향이 아주 강하고 쁘띠 부르주아적 정서가 넘치고 있어. 그것은 계급투쟁 속에서는 위험한 것이지"

"잊어버리지는 않았어요. 잊어 버릴리도 없죠. 단지 역사에 대한 당신들의 태도에는 찬성할 수 없을 뿐입니다. 당신들은 불공평합니다. 요러쉬는 몇 년 전에는 슈 홍종보다 훨씬 커다란 권력을 쥐고 있었고 한짓도 훨씬 악질이었어요. 대중들은 그에 대해서 대단한 불평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자기 비판도 시키지 않고 당 위원회 사무국 주임을 맡겼죠? 그가 고참 간부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인가요? 게다가 당신들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유리한 역사만을 기억하고 있을뿐 불리한 역사는 말살하고 왜곡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다른 사상과 경쟁하는 가운데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것이지 처음부터 유일 절대적인 사상으로 강제해서는 안된다"

"더러운 물. 더러운 물. 어딜 가나 더러운 물을 뒤짚어 쓰게된다. 특히 여자는 더욱 그렇다 특히 나같은 여자는"

"하지만 지금은 자기의 권력밖에 관심이 없다. 지위는 회복되엇지만 인간으로서는 절반밖에 회복되지 못했을 뿐이다. 저속한 절반만을, 사람들이 싫어하는 절반만을."

"겪은 고통이 인간의 가치를 재는 척도가 되지는 못해. 고통은 인간을 고상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비열하게도 만드니까"

" 그 무렵 나는 완전히 농촌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고 은밀히 철학연구를 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인간 및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고 싶었다."

"손 유에, 너는 무슨 파인가, 보수파 아니면 조반파? 나는 네가 독립 사고파이기를 바란다. 비판할것은 단호히 비판하고 지킬것은 단호하게 지키는..."

'감각은 믿을 만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기도 한다. 때로는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수 없는 때가 있다."

"신(神)을 만드는 데는 그 나름의 환경과 조건이 필요하다. 그 환경과 조건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 자신의 영혼이 분열되지 않도록 나는 그녀와의 모든 과거를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다.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그것을 미래로 건네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미래가 어떤 것인지, 언제 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이건 재미있다. 이야기가 훌륭한 변증법 아닌가, 나는 확실히 스스로에게 준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시류는 어떤가, 요러쉬는? 그들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그들이 자기비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스스로에게 준엄하게 구는 바보짓 따위를 할리 있는가! 게다가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다니, 도대체 내게 그런 자격이 있는가. 내위에는 언제나 시류가 있었어.
그리고 우선 역사란 무엇인가, 내가 보는 한, 역사따위는 '뒤엎고' '뒤엎혀진다'는 단 두마디가 전부다. 과거에는 내가 다른 사람을 뒤 엎었고, 지금은 내가 다른 사람한테 뒤엎혀졌다. 그 뿐이다. 지금 '거꾸로 매달려 있는 지경'인 나더러 스스로에게 준엄해야 한다고? 내 신경은 아직 미쳐버리지 않았다고"

"별똥별이 하나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어딘가로 떨어졌다. 그러나 하늘은 변함없이 넓고 조용하다. 별은 아름답게 반짝이고 은하수는 여전히 양쪽 기슭의 견우와 직녀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다.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끝없는 우주에서 별똥별따위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는 없다. 내가 죽어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인류전체에서 본다면 우주에서 별똥별이 하나 흐르다가 소리도 없이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별똥별 따위는 아니다. 인간이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고 사랑이 있고 원망이 있는 인간인 것이다"

"나는 '사회 관계의 총화(總和)'라는 개념만으로는 인간의 본질을 해석하는 것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네. 인간의 자연적 속성(생리적, 동물적인 속성)역시 인간성의 일부분으로서 이것도 인류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그렇게 인정하는 것은 인간을 깍아내리기 위해서만은 결코 아니네. 아니, 오히려 인간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들이 자기의 동물성을 자각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이지. 그것은 은폐하는것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을까"

"밖에 나가 놀다 오너라! 귀찮게 하지말고"
서랍의 열쇠가 내 마음을 잠가버린것 같다. 갑자기 엄마가 전혀 모르는 타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엇다. 모든 것이 남의 일 같은 느낌이다

"한한, 자세가 나쁘다, 똑바로 앉아라!"
또 다시 흠잡기. 침묵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엄마는 마음이 흐트러지면 곧 내 흠을 잡기 시작한다

" 나 스스로 인정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의 저작 같은것은 그다지 읽지 않았다. 나의 마르크스주의는 위로부터 하달되는 지시로 배운것이다. 책따위를 아무리 많이 익은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전집을 다 읽은 자라 할지라도 어차피 오늘 말하는 것과 내일 말하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는가."

" "역사문제는 감정에 맡겨서 처리할수 있는 것은 아닐게다. 시기에 따라 상황이 다르고 정책이 달라지는 법이다" 이럴 때는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가장 위엄을 유지 할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은 자기 감정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잠자코 내손을 잡고는 말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시대의 발걸음을 따라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애써 부드럽게 웃는 얼굴을 만들며 말했다. '네가 말하는 시대의 발걸음 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느끼지 못하십니까. 아버지. 저는 느낍니다, 분명히 강렬하게! 제 마음 속의 격동에서, 수억 인민의 소망에서, 그리고 몇몇 뛰어난 인물들 속에서 분명히 느끼고 있습니다. 폭풍우와 고난에 가득찬 우리들의 생활, 그것이 얼마나 많은 뛰어난 인물을 길러냈는지 아버지는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십니까?"
이것이 아들인가? 마치 딴 사람 같지 않은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은 신선하고 정열에 넘치는 한 사람의 시인이다."

"울지 마. 내일 시 왕이 이사하고 나면 집에는 당신과 나뿐이야. 속았건 어쨋든간에 우리들은 함께 가지 않으면 안돼. 다시한번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어"










칼 맑스 협동조합운동(2)-1864 런던


1864 런던 국제노동자 협회 발기문 중에서 협동조합 부분

                                                           
                                                               - 칼 맑스 -


"우리는 협동조합 운동, 특히 몇몇 대담한 "일손들"에 의해 이루어진 협동조합 공장을 두고 말하는 것 입니다. 이 위대한 실험들의 가치는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논의가 아닌 행위를 통해 그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대규모로 이루어지며 또 현대과학의 진보와 조화를 이루는 생산은 '일손'계급을 고용하는 '주인'계급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열매를 맺으려면 노동수단이 노동하는 사람 자신을 지배하는 수단이나 노동하는 사람 자신을 혹사하는 수단으로서 독점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노예노동이나 농노노동과 마찬가지로 임금노동 또한 과도적이고 낮은 단계의 사회적 형태일 뿐이며, 자발적인 손과 건전한 정신과 즐거운 마음으로 근로가 수행되는 연합된 노동앞에서 사라져버릴 운명이라는 것, 영국에서는 협동조합의 씨앗이 로버트 오웬에 의해 뿌려졌습니다; 대륙에서 시도된 노동자들의 실험들은 사실, 1848년에 발명되지는 않았지만 소리높이 선포되었던 이론에 매우 근접한 실천적 출구입니다

동시에 1848년에서 1864년까지의 경험은 노동자계급의 총명한 지도자들이 1851년과 1852년에 영국의 협동조합운동과 관련하여 주장했던 다음과 같은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하였습니다.

아무리 원칙상 탁월하고 실천상 유익하다 하더라도 협동조합식 노동이 개별노동자들의 우연적인 노력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제한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나는 독점의 성장을 억제할 수 없으며, 대중을 해방시킬수 없으며, 심지어 그들의 빈곤이라는 짐을 눈에 띄게 덜어 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는 귀족들과 브르주아-박애주의적 말꾼들과 싸늘한 몇몇 정치경제 학자들이, 예전에는 자신들이 그 맹아상태에서 숨통을 끊으려 시도한 바 있고,  몽상가의 유토피아라고 비웃은바 있으며, 사회주의자들의 이단이라고 유죄판결을 내린바 있는 바로 그 협동조합 제도에게 아첨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근로대중을 해방시키려면 협동조합제도는 국민적 규모에서의 발전과 국민적 수단에 의한 추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토지귀족들과 자본귀족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독점의 방어와 영구화를 위해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적 특권들을 사용할 것입니다.

노동의 해방을 추구하는 대신에 그들은 그 길에다 자신들의 가능한 모든 장애물들을 실어 나를 것입니다. 파머스턴경이 지난 번 의회 회기에 아일랜드 소작인들의 권리의 옹호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비웃으면서 외쳤을때, 그는 가슴깊이 품었던 것을 털어 놓았던 것입니다;
하원은 토지소유자들의 의회이다!!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칼 맑스 철학의 빈곤(3)


맑스가 안넨코프에게 보내는 편지중에서, 공상적사회주의=쁘띠브르주아의 사상이라는 내용에 관한 부분들은 발췌하지 않았다. 맑스와 프르동의 세계관을 중립적으로 판단하는데 약간 마이너스가 될것 같아서이다.

대기업 특히 다국적 기업의 문제는 이제 엄연한 전 세계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새로이 조명받는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유기농조합 기타등등이 경쟁-독점 또는 독점-경쟁의 구도를 넘어설수 있는지도 참 의문사항이다...

맑스가 말하고 있는 "경쟁과 독점 및 그들 사이의 적대관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일,종합, 그리고 경쟁과 독점사이의 현실적 균형을 표상하고 있는 운동 마저도 폐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정치경제학 비판 강요"를 발췌하고 싶은데... 원서밖에 없어서 난감한 지경^^  기냥 "자본"으로 달려야 하나^^

뱀발) 이 포스팅은 제가 오랜만에 독서하면서, 메모 형식으로 남겨두는 거니, 혹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해도 제 수준이 저열해서 그런거니 용서들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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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넨코프에게 보내는 편지(2)


"프르동씨는 이와함께, 이는 주로 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결핍에서 기인한 것인데, 인간들이 생산제력을 발전 시키는 한 인간은 그들 상호간에 특정한 관계를 발전시키며 또 이러한 관계방식은 생산제력의 변화와 성장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변화될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경제적 제 범주'란 단지 이러한 현실적 제 관계에 대한 추상화에 다름 아니며, 그리고 또 이러한 제 범주들이란 이러한 제 관계가 존속하는 한에 있어서만 진리일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와같은 제 범주들이 단지 특정한 역사적 발전단계와 특정한 생산제력의 발달에만 타당한 역사적 법칙이아니며 영원한 법칙이라고 보았던 브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오류속으로 함몰되어 들어갔던 것입니다.

"(프르동의) 독점이란 선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의 경제적 범주이며, 따라서 신으로부터의 유출이기 때문입니다. 경쟁 또한 선한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 역시 경제적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하지 않은것은 독점과 경쟁의 현실(성) 입니다" 그런데 한층 더 나쁜것은 독점과 경쟁이 서로서로를 잠식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와같은 두가지의 영원한 신의 관념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므로, 프르동씨에게서는 신의 품속안에서는 이러한 두가지 관념의 종합이 현존하며, 또 그종합속에서 독점의 악은 경쟁을 통해 제거되며, 또 경쟁의 악은 독점을 통해 제거되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자명한 것으로 됩니다.

그러나 잠시 현실의 삶을 살펴보십시요. 그러면 귀하는 우리시대의 경제적 삶에 있어서 경쟁과 독점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종합, 하지만 하나의 정식이 아니라 운동인 종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독점은 경쟁을 낳고, 경쟁은 독점을 낳습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방정식이 브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상상하듯이 현재 상황의 제 난점을 제거해주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극복하기 어렵고 또 더 혼란스러운 상황만을 성립시킬 뿐입니다. 따라서 만약 귀하께서 현재의 경제적 제관계가 그것에 기초하고 있는 토대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또 현재의 생산방식을 폐기하고자 한다면 귀하는 단지 경쟁과 독점 및 그들 사이의 적대관계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일,종합, 그리고 경쟁과 독점사이의 현실적 균형을 표상하고 있는 운동 마저도 폐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